
사도 바울이 영적 아들이자 사랑하는 동역자인 디도에게 남긴 편지는 오늘의 목회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교회가 어떤 기초 위에 서야 흔들리지 않는지를 탁월하게 보여 준다. 디도서 1장 5절의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라는 말은 행정 지침의 문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사도적 사명의 핵심과 교회론의 뼈대, 그리고 거짓과 진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의 현장이 진하게 새겨져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목회가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관리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놓은 터 위에 ‘신앙(교리)과 직제(질서)’를 바르고 정직하게 세워 가는 사도적 계승임을 설명한다.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 둔 까닭은 단순한 뒷정리가 아니라, 사도적 사역의 연장선에서 질서를 수립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의 완수를 뜻한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바탕에는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교회의 건강은 교리가 순수하게 보존되고 바르게 가르쳐지느냐에 달려 있으며, 직분과 구조는 그 진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떠받치는 울타리이자 기둥이다. 그래서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최우선 과제를 “신앙과 직제(Faith & Order)의 재정립”으로 짚어 내고, 디도서 1장을 그 기준선으로 세운다.
바울의 선교 철학은 현장에서 검증된 원리로 정련되어 있었다. 도시 중심의 선교를 통해 복음의 확산을 촉진하고, 구속사적 질서에 따라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자비량으로 복음의 자유를 지키고, 남이 닦아 놓은 터가 아니라 미전도 영역으로 뚫고 들어가는 전방개척선교(frontier missions)의 정신을 실천했다. 이런 원리로 그레데라는 큰 섬 곳곳에 복음의 등불이 켜지자, 바울이 다음 단계로 제시한 것은 ‘사람’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는 교회를 단지 늘어나는 모임이나 시설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말씀을 기초로 한 하나님의 ‘집’으로 보았고, 그 집의 무게를 견디는 기둥은 장로들이며, 그 기둥의 강도는 교훈과 인격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디도서 1장 5–9절은 장로(πρεσβύτερος)와 감독(ἐπίσκοπος)을 사실상 동일한 직분으로 언급하면서, 그들에게 요구되는 자격을 가정과 인격, 교리 능력의 차원에서 입체적으로 제시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자격 목록을 ‘리더십 스펙’으로 읽지 말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리더 안에 어떻게 새겨져야 하는지에 대한 초상으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 지도자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므로, 자신의 성향이나 기호를 앞세우지 않고 복음의 선과 공동체의 덕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첫째로 요구한 자격은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이다. 이것은 흠 없는 완벽주의가 아니라, 공동체 안팎의 눈에 비추어 신뢰를 해치는 근본 결함이 없고, 잘못을 돌이켜 회개하며 성숙으로 나아가는 삶의 궤적을 가리킨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의 목회 위기가 제도나 프레임 부족보다 ‘신뢰의 붕괴’에서 시작된다고 진단한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말씀 앞에 삶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자신을 절제하고 관리하는 경건의 훈련이 일상에서 실제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이어지는 기준은 가정의 모범이다. “한 아내의 남편이며 믿는 자녀를 두고 방탕하거나 불순종하다는 비난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은, 가정이 리더십의 시험장이자 축소판임을 말해 준다. 교회는 영적 가족이고,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자가 영적 가족을 맡을 수 없다. 여기서 ‘방탕(ἀσωτία)’은 단지 경제적 낭비가 아니라, 절제와 질서가 무너진 전반적 생활 태도를 뜻한다. 장재형 목사는 가정에서의 사랑과 질서, 말씀과 기도의 생활이 목회 현장과 분리되지 않도록, 리더가 먼저 ‘일상의 거룩’을 훈련해야 한다고 거듭 일깨운다.
부정적 덕목의 제거와 긍정적 덕목의 채움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지도자는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해야 한다. 이 목록은 고대 지중해 세계의 흔한 리더십 병폐를 겨냥하면서도, 시대를 넘어 오늘의 교회를 여지없이 비춘다. 고집은 팀 사역과 제자훈련을 무너뜨리는 은밀한 독(毒)이며, 혈기는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 지름길이다. 모세조차 혈기의 미세한 균열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은, 온유가 얼마나 큰 리더십의 능력인지를 역설한다. 장재형 목사가 자주 상기시키듯,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에서 다루신 뒤“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온유한” 지도자로 세우셨다. 폭력과 탐욕은 오늘도 영적 권위를 한순간에 붕괴시키는 치명적 균열이다. 반대로 지도자는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사랑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해야 한다. 환대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주는 실천이고, 선을 기뻐함은 정체성의 증거다. 신중함은 경솔함의 반대만이 아니라, 복음의 관점으로 사안을 숙고하는 영적 분별을 뜻한다. 의로움은 관계에서의 공정함, 거룩은 목적의 순수함, 절제는 힘의 자기 통제를 가리킨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덕목들이 ‘성품학교’의 과목처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마음을 점령하고 복음이 사랑을 부어 줄 때 자연스레 열리는 열매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자격을 꿰뚫는 핵심은 하나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서,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할 수 있어야 한다.” 장로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진리 수호’다. 바울이 디도에게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일이 곧 교리의 순수성을 지켜 내는 일임을 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레데 교회는 거짓 교훈과 무질서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 특히 “할례파” 가운데 많았다. 은혜의 복음에 율법의 행위를 덧칠하려는 시도는 교회의 심장을 겨누는 칼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 문제로 단호하게 싸웠고, 디도 사건은 그 투쟁의 상징으로 남았다. 디도는 순수한 헬라인이었고, 유대주의자들이 그에게 할례를 강요했을 때 바울은 복음의 자유를 위해 끝까지 거부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구원의 본질에 한 치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는 결기”의 표본이라고 설명한다. 은혜에 행위를 더하면 복음은 무효화되고, 교리는 작은 누룩을 방치할 때 전체가 부패한다.
거짓 교사들의 전술은 대개 공론장이 아니라 은밀한 관계의 틈에서 작동한다. 약한 자를 미혹하고 가정을 흔들며, 동기는 “더러운 이익”에 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입을 막으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침묵은 미덕이 아니다. 양을 맡은 목자는 이리 앞에서 침묵할 수 없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의 사랑과 관용이 진리를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선 안 된다고 경고한다. 사랑은 진리를 기뻐하며, 진리를 훼손하는 행위 앞에서는 훈계와 책망, 권면과 치리가 필요하다. 그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이다. 바울은 그레데 출신 예언자 에피메니데스의 말을 인용해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요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면서, “이 증언이 참되다”고 덧붙인다. 문화적 혐오를 부추긴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교회를 무너뜨리는 거짓의 DNA를 폭로하고, “엄히 꾸짖어” 그들을 “믿음 안에서 온전하게” 하라는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공의와 자비를 함께 품은 치리가 병든 지체를 회복시키고, 결국 몸 전체의 건강을 지킨다고 말한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다”는 1장 15절의 원리는 목회 전 영역을 관통하는 대원리다. 외적 형식과 의식이 경건을 보장하지 않는다. 마음과 양심이 말씀으로 씻기고 복음으로 새로워질 때, 같은 행위도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반대로 마음이 더러워지면 거룩한 것조차 수단화되고, 신앙의 언어조차 권력의 언어로 변질된다. 그런 이들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면서, “가증하고 불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가 된다. 장재형 목사는 그래서 목회의 첫 현장을 ‘사람의 마음’으로 본다. 설교는 정보를 전달하는 강의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 아래 진리가 마음에 박히게 하는 영적 사건이며, 그 사건이 일상에서 지속되도록 뒷받침하는 것이 교리 교육과 제자훈련이다. 교회가 이 순서를 회복할 때, 직분과 조직은 살아 있는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오늘의 교회 현실은 그레데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정보의 과잉은 교리의 혼탁을 낳고, 영향력에 대한 욕망은 직분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그러나 디도서 1장은 길을 잃지 않게 해 준다. 무엇보다 먼저 말씀의 표준을 분명히 하고, 장로와 감독들이 그 표준을 붙들게 해야 한다. 가정과 성품에서 신뢰를 회복하고, 리더십의 윤리를 구체적 습관으로 체화해야 한다. 재정과 권력의 유혹에서 복음의 자유를 지키며, 도시와 문화의 현장에서 환대와 선행으로 복음을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거짓과 불의를 방치하지 말고 사랑으로 훈계하되, 회복을 목표로 공의로운 치리를 시행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가 세계 선교를 바라보며 강조하는 것처럼, 복음이 도달한 곳마다 건강한 리더십이 세워질 때 교회는 자생력을 갖고 뿌리내린다. 교회의 본부는 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총회”이며, 이 땅의 교회들은 그 거룩한 총회의 지체로서 전략적으로 세워져야 한다. 바울이 그레데의 각 성에 장로를 세우라 했듯, 오늘의 도시에 맞는 현지 리더십을 제자화하고 세우는 일이야말로 전방개척선교의 현재형이다. 교회가 이 사도적 설계도를‘그대로’ 실행할 용기와, 말씀을 ‘그대로’ 붙드는 믿음을 가질 때, 복음은 다시 도시의 심장으로 흘러들고, 공동체는 진리 위에 굳건히 선다.
결국 디도서 1장은 임시 처방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를 위한 사도적 청사진이다. 남겨진 일을 정리하고, 각 지역 교회에 진리의 기둥을 세우며, 거짓을 책망하고 성도를 권면하는 일은 특정 시대의 과제가 아니라 매 세대가 반복해 감당해야 할 소명이다. 장재형 목사가 줄곧 외쳐 온 대로, 목회는 진리를 사수하는 영적 전쟁의 최전선이고, 교회는 복음의 순수성과 거룩한 질서 위에 세워질 때만 세상의 문을 열 수 있는 하나님의 집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이 말씀 앞에서 마음과 양심을 씻고, 교리와 직제를 바로 세우며, 디도처럼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동역자로 성장하는 제자훈련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 길 끝에서 바울의 명령은 여전히 유효하다. “남은 일을 정리하라.” 그리고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라.” 진리의 기둥을 세우는 그 순간, 교회는 다시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