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7장 7-25절은 신앙을 “바르게 말하는 기술”이 아니라 “진실하게 살아내는 투쟁”으로 드러내는 본문이다. 바울은 교리적 논증을 하면서도 삶의 결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균열과 저항, 욕망과 양심, 열망과 습관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밀쳐내는 격전을 그대로 노출한다. 장재형(Olivet University)목사가 이 대목을 강해하면서 반복해 붙드는 핵심은, 율법을 악으로 몰아가는 단순한 도식이 아니라 율법의 거룩함과 죄의 간교함이 맞부딪히는 지점에서 드러나는 인간 실존의 비극, 그리고 그 비극을 돌파하는 은혜의 길이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바울의 단호한 부정은, 율법을 내치는 변명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본래적 선함을 선명히 복권시키는 선언이다. 율법이 죄라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죄가 되고, 거룩한 분의 명령이 오염된 것이 된다. 그러나 바울은 그 길로 가지 않는다. 율법은 거룩하다.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율법 앞에서 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리고 죄에 팔린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있다.
장재형목사는 율법의 거룩함을 설명하면서 “법도”라는 감각을 꺼내 든다. 자연은 무질서의 집합이 아니라 질서의 교향곡이며, 생명은 제멋대로의 방종이 아니라 정해진 길 위에서 번성한다. 물고기는 물이라는 경계 안에서 살고, 새는 하늘이라는 영역 안에서 비행한다. 경계는 생명을 억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생명답게 작동하도록 지탱하는 틀이다. 창세기 2장 17절의 “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그 명령은 인간을 괴롭히려 던진 족쇄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하도록 지켜 주는 울타리였다. 그런데 죄는 언제나 울타리를 ‘감옥’으로 바꾸어 해석하게 만든다. 보호를 억압으로 오해하게 하고, 사랑의 질서를 통제로 의심하게 만들며,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신앙의 첫 번째 균열은 대개 행동의 일탈보다 인식의 비틀림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려 주신 말씀을, 내가 자유를 빼앗는 폭력처럼 느끼는 순간, 죄는 이미 마음의 중심을 흔들어 놓는다.
바울이 예로 든 계명은 “탐내지 말라”이다. 이것은 죄를 단지 겉으로 드러난 사건으로만 보지 못하게 한다. 누군가를 해친 행위, 규범을 깬 표면적 위반만이 죄가 아니라, 그 모든 행위를 잉태하는 내면의 욕망 자체가 죄의 온상이라는 사실을 계명은 폭로한다. 장재형목사는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가진 날카로운 깊이를 강조한다. 이전에는 죄를 ‘실행’과 연결해 이해했다면, “탐내지 말라”는 죄를 ‘갈망’과 연결해 이해하게 만든다. 이때 인간은 자기 내부를 피할 수 없다. 남에게 들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회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교적 외형을 유지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합리화해 온 모든 장치들이 무력해진다. 죄는 더 이상 외부의 사건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은밀히 자라나는 ‘원함’의 방향이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율법의 첫 기능이 드러난다. 율법은 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알게’ 한다. 아프게 하지만, 그 아픔은 진단의 통증이다. 병을 숨기기 위해 통증을 없애면 결국 몸 전체가 무너진다. 율법은 내 안의 병을 드러내어, 내가 마침내 치료를 갈망하도록 몰아간다.
그러나 바울은 한 발 더 나아가, 율법을 대하는 인간 내면에서 발생하는 역설을 말한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다.” 죄는 단순히 ‘나쁜 선택’의 총합이 아니라, 선한 것을 이용해 악을 강화하는 교활한 힘으로 묘사된다. “하지 말라”는 말이 들릴수록 오히려 ‘하고 싶음’이 증폭되는 경험은 인간 심리의 기묘한 보편성을 보여 준다. 금지된 열매가 더 달아 보이고, 막힌 문이 더 궁금해지며, 경계 밖에 더 큰 자유가 있을 것처럼 느끼는 충동이 생긴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위험천만한 영적 상황”은 바로 이것이다. 말씀을 들을 때 죄가 떠나가야 마땅한데, 죄는 말씀을 발판으로 더 집요한 욕망을 일으킨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두 갈래 길에 선다. 하나는 그 괴로움이 ‘죄가 드러나는 고통’임을 인정하고 구원을 갈망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말씀 자체를 불편한 적으로 돌려 세우거나, 혹은 “어차피 못 지키니 그냥 하자”는 냉소로 미끄러지는 길이다. 바울은 둘째 길이 죄의 계략임을 폭로한다. 죄는 율법을 없애는 것으로 승리하지 않는다. 죄는 율법을 이용해,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가거나 오만으로 부풀려서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써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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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라는 문장은, 무지의 평안을 폭로한다. 죄를 죄로 자각하지 못하면 인간은 ‘살아 있는 듯’ 느낀다. 양심의 경보가 꺼지면 삶은 편해진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건강이 아니라 마비다. 계명이 이르매 죄가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는 바울의 고백은, 인간이 자기 의로움의 신화를 잃어버리는 죽음이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기 해석이 무너지고, “나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선명해지는 순간, 인간은 영적 사망의 그늘을 체감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서 율법의 한계를 말한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지만 죄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율법은 치료제가 아니라 진단서다. 진단서는 병을 낫게 하지 못하지만, 진단서가 없으면 치료의 필요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율법이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임에도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역설이 생긴다. 그 역설은 율법의 실패가 아니라, 죄가 진단서를 찢어 치료로 나아가지 못하게 붙잡는 폭력이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가 특별히 경계하는 것은 “계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자학하거나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태도”다. 죄는 한 사람을 절망에 가두는 방식으로만 역사하지 않는다. 죄는 또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권력으로 율법을 변질시킨다. ‘거룩함’이 타인을 향한 공격이 되고, ‘의로움’이 관계를 찢는 칼이 되며, ‘선함’이 공동체를 숨 막히게 하는 규율주의로 전락할 때, 율법은 더 이상 생명의 길로 작동하지 않는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계명은 악하지 않다. 그러나 죄는 그 선한 것을 이용해 인간을 죽인다. 그래서 복음의 자리가 필요해진다. 장재형목사가 요한일서 1장 9절의 “죄를 자백하면 깨끗하게 하신다”는 약속을 끌어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백은 자기 변명의 포기이며, 은혜의 문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행위다. 죄가 인간을 파괴하는 가장 치명적인 방식 중 하나는 죄 자체보다 죄책감의 족쇄다. 죄책감은 하나님께로 달려가게 만들 수도 있지만, 사단의 참소로 변질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게 만든다. 복음은 죄를 덮어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드는 값싼 방관이 아니다. 복음은 죄를 죄로 드러내되, 죄인에게 돌아올 길을 열어 주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은혜는 “죄를 무시하는 관대함”이 아니라 “죄인을 살리는 능력”이다.
바울은 창세기 3장의 유혹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죄의 교묘함을 더 깊이 파헤친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라는 말은, 뱀이 하와에게 던진 질문의 구조와 닮아 있다. “하나님이 참으로… 하시더냐”라는 문장은 노골적인 반항이 아니라 미세한 비틀기다. 죄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죄는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든다. 계명을 억압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사랑이 아니라 경쟁자로 느끼게 만들며, 결국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을 자극한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믿음”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선함을 신뢰하는 결단이다. 믿음은 선택의 순간에 작동한다. 계명이 들려올 때, 그것을 ‘나를 살리는 길’로 받아들이느냐, ‘나를 막는 벽’으로 오해하느냐에 따라 영혼의 방향이 갈린다. 그래서 신앙은 정보의 축적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식이 믿음을 무너뜨리는 방식도 존재한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하나님을 분석 대상으로 만들고, 신뢰 대신 계산을 선택하며, 순종 대신 협상을 시도하는 마음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죄가 원하는 것은 한 가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믿음의 일치를 깨뜨리는 것, 다시 말해 한 마음을 두 마음으로 갈라놓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율법을 버리자고 하는가? 정반대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 장재형목사는 이 문장을 통해 율법폐기론적 오해를 경계한다. 은혜가 강조될수록 율법이 무가치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율법을 잃어버린 은혜는 방향을 잃기 쉽고, 은혜를 잃어버린 율법은 사람을 질식시킨다.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방종이 아니라, 죄가 더 이상 주인이 될 수 없다는 해방의 선언이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라는 말씀은 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죄가 통치권을 빼앗겼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계명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살리는 자리로 옮겨 서야 한다. 계명을 지키려는 노력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되면 그 노력은 곧바로 절망을 낳는다. 반대로 계명을 무시하면 죄의 언어가 삶을 지배한다. 은혜는 이 두 극단을 가르는 제3의 길, 곧 사랑 안에서 계명의 참 뜻을 회복시키는 길이다.
바울의 다음 고백은 신앙을 장식하는 모든 거짓 담요를 걷어낸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팔렸다”라는 표현의 무게를 길어 올린다. 그것은 단순히 “붙잡혔다”가 아니라, 빚과 종속과 거래의 이미지가 들어 있는 말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출할 힘이 없어 죄의 시장에 내던져진 노예처럼 묘사된다. 그래서 복음의 중심에 “속량”이 등장한다. 속량은 누군가의 대가 지불로 노예가 풀려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값을 치르셨고, 그 값은 단순한 도덕적 감동이 아니라 생명의 대속이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는데도 왜 “팔렸다”는 고백이 지속되는가? 바로 여기에 성화의 시간이 있다. 칭의가 지위와 자격의 변화라면, 성화는 상태와 습관이 변화하는 길고도 섬세한 여정이다. 이미 아들이 되었으나, 여전히 종의 습관이 몸에 남아 있다. 이미 시민권을 얻었으나, 여전히 노예의 언어로 생각하고 반응하는 시간이 있다. 이 간극 속에서 바울은 탄식한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바로 이 불협화음이다. 하고 싶은 것과 실제로 하는 것 사이의 간극, 사랑하고 싶지만 상처 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현실, 용서하고 싶지만 분노가 더 빠르게 치솟는 마음의 메커니즘은 신앙이 가짜라서가 아니라, 신앙이 진지해질수록 더 또렷하게 경험되는 전쟁이다.
이 대목에서 바울은 놀라울 만큼 정직하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신앙이 인간을 로봇처럼 만들지 않는다는 증거가 여기에 있다. 은혜는 인간의 인격을 삭제하지 않는다. 은혜는 오히려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면서, 동시에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왜곡을 더 예민하게 느끼게 한다. 장재형목사가 베드로의 부인, 바울 자신의 떨림, 겟세마네의 통곡 같은 장면을 불러오는 이유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두려움과 흔들림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기 위해서다. 강한 척하는 신앙은 종종 가장 약한 지점을 숨기기 위해 만들어진 가면이다. 그러나 복음의 정직함은 “약함 속에 강함”을 드러낸다. 나는 넘어지지만, 넘어짐이 곧 정체성의 결론은 아니다. 나는 실패하지만, 실패가 곧 하나님의 사랑의 종결은 아니다. 오히려 그 실패의 자리에서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는 분별이 생긴다. 이것은 책임 회피가 아니라 영적 식별이다. 죄를 내 인격의 본질로 동일시하지 말라는 경고다. 죄는 ‘불법 점거자’처럼 인간을 점령하지만, 그 점령이 곧 소유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복음은 죄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죄가 인간을 규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래서 신앙의 지혜는 분별지다. 내 안의 “하나님의 형상된 나”와 “죄가 덧씌운 나”를 가르고, 회개해야 할 것을 회개하되 절망하지 않고, 싸워야 할 것을 싸우되 자학하지 않는 균형이 필요하다.
바울은 마침내 “한 법”을 깨닫는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신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사실,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 마음의 법과 싸우며 자신을 사로잡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한 심리 갈등이 아니라 영적 현실의 진술이다. 인간은 단일한 욕망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은 사랑의 방향으로도, 자기중심의 방향으로도 동시에 끌린다. 그중 무엇이 주도권을 잡느냐에 따라 삶의 궤적이 달라진다. 그래서 바울의 탄식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는 패배 선언이 아니라, 진짜 도움을 구하는 구조 신호다.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는 오만이 끝나고, 참된 구원자를 향한 갈망이 시작되는 자리다. 장재형목사가 이 탄식을 성화의 길에서 매우 유익하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약 이 탄식이 없다면, 신자는 자꾸 분칠을 한다. 겉으로는 완전한 척하고, 속으로는 무너지고, 결국 더 깊은 위선과 더 깊은 고독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탄식은 가면을 벗기는 은혜다. 탄식은 “나는 아직 길 위에 있다”는 고백이며,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신앙의 호흡이다.
이 모든 긴장의 끝에서 바울은 돌연히 빛으로 뛰어오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탄식이 마지막 문장이 아니다. 죄의 묘사가 결론이 아니다. 내면의 전쟁이 전부가 아니다. 장재형목사가 이 본문을 단지 인간학적 비관으로 끝내지 않고, 감사의 찬가로 봉합하는 까닭은, 로마서 7장이 결국 로마서 8장의 숨결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죄의 법과 하나님의 법 사이에서 찢기는 영혼이 끝내 붙드는 것은 자기 수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다. 그 은혜는 단지 죄를 용서하는 판결문에 머물지 않는다. 은혜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함께 서 주는 임재이며,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으키는 손길이며, 죄책의 고리를 끊고 다시 숨 쉬게 하는 생명의 능력이다.
이 대목을 한 폭의 명화로 비추어 보면,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가 떠오른다. 이 작품은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를 그리지만, 로마서 7장이 품은 정서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 그림 속 탕자는 기진맥진한 몸으로 아버지 앞에 무너져 앉아 있고, 아버지는 그 아들의 등을 두 손으로 감싸 안는다. 한쪽에 선 형의 시선은 냉랭한 평가와 거리감을 품고, 주변 인물들은 어둠 속에서 침묵한다. 이 그림이 렘브란트의 말년 작품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은, 이 장면이 단순한 이야기 삽화가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길어 올린 ‘귀향의 신비’임을 암시한다. 로마서 7장 속 바울의 고통은 “왜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을 이루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으로 타들어 가지만, 그 질문이 끝내 도착하는 곳은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간구이며, 그 간구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다. 탕자는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씻어 체면을 회복한 다음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꾸밀 수 없을 만큼 망가진 모습 그대로 돌아온다. 바로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손이 먼저 닿는다. 은혜는 인간의 정돈을 기다리지 않는다. 은혜는 인간의 붕괴 한복판에서 시작된다. 렘브란트가 빛을 아버지의 손과 아들의 어깨에 집중시키는 듯한 구도는, 율법이 폭로한 죄의 참혹함을 넘어, 은혜가 붙드는 생명의 중심을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증언한다.
장재형목사의 로마서 7장 설교가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실제적인 이유는, 이 본문이 “열심히 하면 된다”는 단순한 도덕주의도 아니고, “어차피 안 되니 괜찮다”는 허무주의도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은 선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명을 멀리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는 계명으로 자신을 구원하지도 않는다. 죄가 계명을 이용해 우리를 죽이는 구조를 간파해야 한다. 말씀을 들을수록 절망이 깊어질 때, 그것이 회개의 문이 되도록 해야지 참소의 감옥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말씀을 들을수록 타인을 정죄하고 싶어질 때, 그것이 곧 죄가 계명을 무기로 바꿔 쥔 징후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죄를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죄가 더 이상 최종 판결권을 갖지 못한다는 뜻이다. 죄는 여전히 유혹하고, 여전히 속이고, 여전히 기회를 엿보지만,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다시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뱀의 언어 대신,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복음의 언어를 붙잡을 수 있다. 탐심이 올라올 때, 그것이 내 본질이라고 절망하기보다 그것이 내 안에 침투한 죄의 법임을 분별하고, 즉시 빛 가운데로 가져가 자백함으로써 사슬을 끊을 수 있다. 그 과정은 한 번의 결심으로 끝나지 않는다. 성화는 길고, 반복적이며, 때로는 지치게 한다. 그러나 바울이 마지막에 부르는 감사는, 그 길이 헛되지 않다는 확증이다.
결국 로마서 7장 7-25절은 우리를 자기 자신에게서 끌어내어 그리스도께로 옮겨 세운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는 결말은, 한 인간의 분열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열의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분열을 관통해 역사하시는 은혜의 실재를 더 크게 드러낸다. 장재형목사가 이 본문에서 반복해서 길어 올리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율법을 버리지 말라. 율법을 신으로 만들지도 말라. 죄의 간교성을 모른 채 계명을 손에 쥐면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찌를 수 있다. 그러나 은혜 안에서 계명을 받으면, 계명은 생명의 울타리가 되고, 죄의 정체를 드러내는 빛이 되며, 결국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안내가 된다. 그러니 신앙의 마지막 언어는 자랑이 아니라 감사다. 오늘도 “오호라”의 자리에서 “감사하리로다”의 자리로 건너가게 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 길에서 신자는 매번 새로 배운다. 내가 내 힘으로 나를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건져내시는 분께 내 전부를 맡길 때 비로소 숨을 쉰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숨결이야말로, 장재형목사 설교가 로마서 7장에서 우리에게 되살려 주려는 복음의 실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