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 탕자의 비유

1. 탕자의 비유에 담긴 복음의 핵심

누가복음 15장은 복음서 전체에서 가장 복음의 본질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에 이어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는 특히나 길고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수많은 신학자와 설교자들이 이에 대한 해석과 가르침을 전해 왔습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 역시 누가복음 15장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며, 이 장에 흐르는 복음적 핵심과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강조해 왔습니다. 특히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 중에서도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고 그들을 영접하신 이유를 해명해 주시려는 맥락에서 주어졌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왜 저 사람은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밥을 먹느냐?”라는 질문을 넘어서 원망으로까지 치달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연이어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놓치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복음의 참된 의도’를 드러내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대단히 종교적인 엘리트였습니다. 자신을 ‘구별된 자’로 여기며 일상적으로 율법의 조항을 지키고, 말씀을 필사하고 가르치는 책임을 맡았기에, 겉보기에는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의로운 집단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낯설게 느꼈습니다. 예수께서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식탁 교제를 나누는 일”을 거부감 없이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이상하게 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늘 경건하게 살아왔고, 말씀의 가르침을 중시하니, 당연히 ‘죄인들과의 접촉’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모습, 즉 ‘죄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들 가운데 들어가서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 점을 두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단순한 비판이 아닌, 더 깊은 수준의 감정인 ‘원망’을 품게 됩니다. 그들의 논리로 보면, “신성을 모독하는 태도” 또는 “정결함을 깨뜨리는 행동”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원망에 대응하여 세 가지 비유를 차례로 말씀하십니다. 그 결론은 “하나님께서는 잃은 자 하나를 찾으시며, 돌아온 자 하나로 인해 기뻐하신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비유가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비유를 통해 ‘죄인의 회개와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떠올립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이 렘브란트의 그림 <탕자의 귀향>을 묵상하여 쓴 책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처럼, 이 비유는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탕자의 벗겨진 신발, 무릎을 꿇은 자세,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기다렸던 아버지의 모습, 형의 질투 가득한 표정 등은 인간 내면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이 비유는 복음의 정수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장면들을 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하를 살펴보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먼 나라로 가서 그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써버렸는데, 결국에는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철저히 바닥을 치고 궁핍해집니다. 배고픔에 허덕이며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 절망 속에서 그는 “아버지 집에는 풍족한 품꾼들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라고 깨닫고,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며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일어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아버지가 아직 거리가 먼데 그 아들을 ‘측은히 여겨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인다”고 선포합니다. 성경은 이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어떤 ‘조건’도 달지 않습니다. 탕자가 돈을 어떻게 탕진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죄악을 저질렀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단지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를 기뻐하고 환영합니다. 한편, 여기에 반발하는 인물이 바로 형입니다. 그는 “왜 동생에게 그토록 호의적이신가?”를 따지고, “나는 여러 해 아버지 곁에서 명을 어긴 적이 없는데도 염소 새끼 한 마리조차 주신 적 없다”고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 15:31)”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돌아온 동생을 두고 “이 내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었기에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언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비유를 해설하면서, 두 아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처한 영적 상태’를 다각도로 성찰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나게 된 동기는 소유에 대한 ‘잘못된 이해’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 중 내게 돌아올 몫”을 요구했고, 그것을 오로지 ‘내 것’으로만 여겼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요구를 들어주셨고, 그 결과 아들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보며 화를 내거나 심판을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멀리서 돌아오는 순간부터 달려가 안아주었고, 온갖 좋은 것을 아들에게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이처럼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또는 교회 안에서 신앙 경력이 오래된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착각이 있습니다. 바로 “나는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어 왔고, 말씀에 충실했으니 당연히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저렇게 죄 많고, 방탕한 이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게 맞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비유로 밝히신 바는 그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자라면 누구든지 기쁨으로 맞아주시는 아버지” 그리고 “이미 아버지 집에 계속 거해 왔던 이라도, 여전히 그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면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지점에서 ‘복음’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복음은 ‘죄인을 향한 구원의 기쁜 소식’인 동시에, 이미 종교의 틀 안에서 나름의 의를 쌓아온 이들에게는 때로 낯설고 불편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자를 부르러 오지 않으셨다”는 주님의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으로 인해 더 큰 기쁨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복음의 역설을 되짚으며, 교회 공동체가 때로는 탕자의 상황에 빠진 자, 또는 형의 위치에 선 자를 각각 성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늘 “나는 집 안에 있으니 괜찮다”고 안심할 것이 아니라, 정작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사는 ‘형’과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지칠 대로 지친 이들이 돌아올 때, 교회가 ‘조건 없는 환대’와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끊임없이 자문해야 합니다.

한편, 탕자의 비유는 예레미야 31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1장에는 에브라임이 멀리 떠났다가 스스로 탄식하며 “주님,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습니다”라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할 때마다 내 마음이 깊이 요동한다.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라고 선포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가 탕자를 향해 보인 태도와 정확히 일치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예레미야 31장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통해 일관되게 “하나님의 사랑, 죄인을 향한 불쌍히 여김, 그리고 돌아오는 자에 대한 기쁨”을 그립니다. 이것이 곧 복음의 뿌리이자 핵심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당시 사람들조차도,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조차도, 이 사랑과 기쁨의 본질을 놓쳤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과 같이 식사하며 그들을 영접하실 수 있는가?”라고 거부감을 나타냈으나, 실제로 복음이란 “인간의 좁은 법칙이나 관념을 뛰어넘어,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전하는 소식이었습니다. 교회가 그 복음을 진정으로 경험하고자 한다면, 우리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란, 먼 나라에서 방황하다 돌아오는 자를 조건 없이 안아주는 것이며, 이미 곁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아버지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그에게 진정한 기쁨이 없음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회개와 용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야기할 때도, 이 탕자의 비유를 즐겨 인용합니다. 탕자가 돌아오며 한 고백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본래 아버지와 나는 하나였으며, 아버지 품을 떠나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신 것처럼, 인간 존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나 물질적 욕망을 ‘자유’라고 착각한 나머지, 스스로 아버지를 떠나는 길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탕자의 모습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아버지와의 하나됨 속에서 누리는 자유”이며, 진정한 사랑은“전적인 자유를 전제로 한 선택”에서 꽃피게 됩니다.

그렇기에 탕자의 귀향은 단순한 교훈 이상의 ‘존재론적 귀환’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충만한 삶을 살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회개할 때, 아버지께서 아무 조건 없이 달려 나와 우리를 안아주신다는 진리가 드러납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복음의 본질적 메시지이자, 사람들을 영적인 감동으로 이끄는 소식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 결국 이 비유가 보여주는 ‘조건 없는 환대’와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을 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목할 것은, 형의 태도입니다. 형은 “나는 떠나지도 않았고, 명을 어기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잔치를 해주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따져 묻습니다. 아버지는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 것은 다 네 것이었다”고 대답합니다. 형이 심정적으로는 아버지를 떠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은 자신이 ‘집 안에 머문 공로’로 무언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애초에 “나는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는 내 것이요, 모든 것이 이미 함께 공유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오래 신앙생활을 해온 이들이나, 어느 순간부터 ‘봉사나 섬김’을 많이 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도 흔히 나타나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했고, 희생했으며, 규율을 지켜왔다. 그런데 왜 저렇게 세상에서 방탕하다 온 사람들을 그렇게 환영해주는가? 그리고 왜 나를 특별히 기뻐해 주시지 않는가?”라는 마음이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네가 바라보는 눈에 문제가 있다” “이미 내 것이 다 네 것이고, 우리는 하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지만, 형은 이 진리를 알지 못함으로써 스스로 분노와 소외감에 빠지고 맙니다.

이 비유는 두 아들을 모두 향해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영적 무지,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모습”을 드러내게 만듭니다. 둘째 아들이건, 첫째 아들이건 모두 인간의 한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아버지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소유, 그리고 잔치를 열어주십니다. 잃었다가 얻은 것은 더 큰 기쁨이며,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더 큰 감사의 이유입니다. 이 메시지가 바로 예수님의 대답이며,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시는 그분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근거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들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는 율법적 규정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복음적 원리를 실제로 구현하셨습니다.

이처럼 탕자의 비유는 한편으로는 죄인을 향한, 또는 방황하는 이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신앙의 울타리 안에 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더 깊은 깨달음’이 없으면 실상 아버지와 동행하는 기쁨을 놓친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공동체가 이 두 가지 면을 모두 간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언제든지 먼 나라에서 돌아오려는 이들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고, 동시에 이미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도 ‘내가 진정 아버지 마음을 알고 있는가?’ ‘나는 아버지와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를 성찰해야 합니다. 둘 중 하나라도 소홀히 할 때, 복음은 왜곡되고 공동체의 본질은 흔들립니다.

탕자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며 ‘자기 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열거하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근본 원인은 ‘물질’ 자체가 아니라 ‘소유에 대한 집착과 잘못된 해석’임을 이 비유가 분명히 보여줍니다. 둘째 아들은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깨졌습니다. 자기 분깃을 챙겨 먼 나라로 떠나 버렸고, 거기서 방탕하게 삶을 소진해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결국 죄란 ‘하나님 없이 스스로 선(善)을 누릴 수 있다고 착각하는 태도’이자, ‘아버지의 것이 이미 나의 것임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며 멀리 달아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어느 순간 자기 실존의 바닥을 보게 됩니다. 그때 그가 깨달은 것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는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회개’라고 부르며, 아버지께서 달려 나와 품어주신 것을 ‘용서’라고 부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회개와 용서’라는 말이 단순히 종교적 개념으로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사건’으로 다가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날 때, 인간은 비로소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로 연명하던 비참함’을 벗어나 ‘살진 송아지로 잔치를 벌이는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이처럼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뿐 아니라, 구약 시대로부터 이어온 하나님의 구원 계획, 그리고 교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길잡이가 됩니다. 우리는 각자 삶의 어느 순간에 탕자처럼 방황할 수 있고, 또 어느 순간에는 형처럼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놓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께 돌아가 ‘내가 진정 어디에 속해 있으며, 누가 나를 이렇게까지 기다리고 계시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15장이 전해주는 복음의 중심이며, 교회가 곱씹고 전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결국 이 비유의 결말은 “네 동생이 돌아왔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아버지의 말씀으로 맺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거창한 교리나 의무가 아니라, ‘환대의 자연스러운 반응’이 담겨 있습니다. 반가운 이가 돌아오면 맞이하고, 함께 기뻐하며, 그에게 잔치를 베푼다는 단순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이나 이기심은 이마저도 어렵게 만들곤 합니다. 특히 형처럼, “난 왜 특별한 대접을 못 받지?”라는 시기와 질투가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합니다. “나는 이미 아버지 곁에서 모든 것을 누리고 있었는데, 정작 그 사실을 잊은 건 아닐까?” 왜냐하면 ‘이미 아버지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더 크고 근본적인 진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마음에는 오히려 형언할 수 없는 자유와 기쁨이 솟아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을 통해 교회가 지속적으로 갱신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돌아오는 탕자’를 환영하는 공간이어야 하고, 동시에 ‘여전히 아버지를 오해하고 있는 형’에게도 깨달음의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외적인 종교생활이나 봉사가 충실하다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 마음을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진정한 영적 성숙은 “나와 아버지가 이미 하나이며, 모든 것이 함께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기뻐하며 형제와 자매를 환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어떤 대가나 조건 없이 아버지를 닮아가려는 이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비로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제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탕자의 귀향』이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렘브란트의 그림<탕자의 귀향>을 통해, 무릎을 꿇고 초라하게 돌아온 아들의 자세와, 그 아들의 등을 감싸는 아버지의 손, 그리고 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며 질투 어린 시선을 보내는 형의 모습을 세밀하게 관찰합니다. 그림 자체가 이미 이 비유가 전하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시각화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 내면의 심리적·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탁월한 장치입니다. 누구나 언젠가 탕자였고, 누구나 형이었던 때가 있음을 자각하고,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가는 길을 택하라는 초대가 바로 이 비유 안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 전제 상황인 바리새인들의 원망을 해소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다시 한 번“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을 발견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틀림없이 경건 생활에 힘쓰고, 말씀을 필사하고, 가르치며, 정결법을 준수하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얼마나 죄인들을 향해 ‘측은함’을 지니시고, 그들을 향해 다가가시는 분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죄인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크게 기뻐한다는 말씀을 들려주셔도, 그들에게는 낯선 이야기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쌓아 온 경건과 의로움은 무엇이란 말인가? 저렇게 돌아온 죄인을 그냥 받아주는 것이 맞는가?”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바로 그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과‘죄인에게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알리기 원하셨고, 탕자의 비유로써 그 충격을 극대화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샌가 ‘형의 자세’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나는 교회에 늘 참석하고, 헌금도 드리고, 봉사도 하고, 말씀도 잘 알고 있다”는 의식이 쌓이면서,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온 사람들을 오히려 반가워하기보다, 은연중에“나는 이만큼 해왔는데, 너는 뭐냐?”라는 태도를 취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에게 변함없이 말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 것은 다 네 것이었어. 그런데 네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우리가 당연히 기뻐하는 것이지 않겠니?” 이 말을 가슴으로 듣지 못하는 순간, 형은 자기 의(義)의 틀 안에 갇히게 되고, 동시에 아버지의 진정한 선물과 기쁨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탕자 같은 존재들이 돌아오는 것을 최고로 기뻐해야 하며, 동시에 이미 교회 안에서 수고한 이들도 “내가 아버지와 동행하는 즐거움을 날마다 누리고 있는가? 혹은 내가 아직 아버지를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의도이자, 복음의 능력이 현실화되는 길입니다. ‘교회의 문턱이 낮아야 한다’는 표현은 결코 단순한 관용이나 기독교 윤리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자체가 ‘아무 조건 없이 돌아오는 자를 환영하시는 모습’임을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원망은, 어느 면에서 보면 우리 인간 모두가 공유하는 ‘의로움에 대한 욕구’와 ‘불공정에 대한 불만’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을 저렇게 쉽게 받아주면 정의가 훼손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제시하는 결론은 놀랍게도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가진 정의의 본질”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회개한 죄인에게 구원을 베푸는 데 전혀 인색하지 않고, 오히려 잔치를 베푸는 곳’입니다. 아버지는 스스로 바닥까지 떨어진 아들이지만 돌아오기만 하면 그를 끌어안고 키스하며, 다시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이런 광경을 인간적으로만 보면 불공정해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로마서가 강조하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선언을 다시 떠올릴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스스로 어둠으로 치우쳐진 존재’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그 은혜는 방탕하게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에게나, 집안에 머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던 형에게나, 동일하게 필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와 용서의 기적”을 보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돌아와야 하고, 누구나 아버지의 마음을 새롭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나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시는’ 하나님의 기쁨과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탕자의 비유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크게 두 갈래입니다. 첫째,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돌아오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걸음에도 즉시 반응하셔서 무조건적인 환대를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은 “나는 집에 있으니 괜찮다”는 생각이 아니라, “정말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는가?” “이미 아버지와 함께 있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둘 중 하나를 놓치면, 우리는 복음의 온전한 기쁨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메시지를 한국 교회 현실에 자주 적용하곤 합니다. 교회 안에도 여러 가지 분쟁이나 갈등이 생길 때, 그 근원을 따져 보면 “내 것”에 대한 집착, 곧 “이건 내 몫”이라는 의식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난 이유가 바로“아버지의 재산 중 내게 돌아올 몫”을 미리 챙기려는 데서 비롯되었음을 떠올리면, 오늘날 교회 안에 일어나는 여러 다툼과 분리 현상의 이면이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말씀하시며, 원래부터 모든 것을 공유하고 나누는 것이 마땅함을 가르치십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결국 탕자처럼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피폐해질 수 있고, 형처럼 스스로 의로움을 자부하다가 오히려 기쁨을 잃고 질투에 빠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소유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이미 다 주신 것 아닌가? 나는 지금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진정한 제자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오히려 빈손이 되어서 주시는 은혜를 마음껏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만일 어느 공동체가 끊임없이 자기 몫,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면, 그것은 이미 탕자나 형이 보여준 ‘왜곡된 소유관’을 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하고, 소유를 내세우기보다 은혜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를 길러야 합니다.

복음서 전체 맥락에서 보면,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 직후에 이어지는 누가복음 16장에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 재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을 주십니다. 원래 성경은 장(章) 구분이 없었기에, 15장의 ‘탕자의 비유’와 16장의 ‘청지기 비유’는 한 흐름에서 읽어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가 “소유의 잘못된 이해와 그 결과”를 보여준다면, 청지기 비유는 “재물을 지혜롭게 다루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은 이미 탕자 이야기를 통해, 소유에 대한 집착이 결국 분리를 가져오며, 아버지의 마음과 단절되게 만든다는 점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너희가 부자가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강조하십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연계하여, 교회가 부유해질수록 더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소유욕과 분쟁임을 설파합니다. 부자가 되어도 ‘청지기 정신’을 잃지 않는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더 크게 확장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 몫’을 챙기느라 공동체가 분열할 위험이 높다는 것입니다.

결국 누가복음 15장과 16장은 우리에게 같은 교훈을 확장적으로 전달합니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셨고, 아버지 역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며, 돌아오기만 하면 환대하신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청지기 비유를 통해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부유해질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숙고하게 됩니다. 교회가 많은 재원과 인력을 확보했을 때, 그 부를 어떻게 사용해야 진정 ‘천국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인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너희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시며, 결국 그 재물이 영원한 거처를 대비하는 데 쓰이도록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는 앞서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결국 모든 것이 아버지께 속했음을 깨닫고, 우리 역시 그것을 한없는 감사와 나눔의 마음으로 다루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탕자의 비유는 이처럼 개인적 차원의 회개와 구원, 공동체 차원의 환대와 나눔,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가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깊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교인들에게 누가복음 15장을 공부할 때마다, “두 아들의 이야기”라고 부르며, 교회 안에서도 ‘탕자적 성향’과 ‘형의 성향’을 모두 지닌 이들이 존재함을 깨닫게 하려 합니다. 우리의 실제 삶에서도 때로는 죄의 유혹에 빠져 충동적으로 먼 나라로 떠나고, 어느 순간 빈손으로 돌아와 회개할 때가 있으며, 또 어떤 시점에는 “나는 왜 저 사람보다 대우를 못 받지?” 하고 서운해하거나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아버지께서 그 모든 어그러짐을 치유하시고 하나로 모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교회’가 이 땅에서 구현해야 할 모습입니다.

탕자의 귀환 장면이 특히 감동을 주는 이유는, 아버지가 보여주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Compassion)’이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논리대로라면, 그 아들은 재산을 낭비하고 돌아온 패배자일 뿐이므로, “어떻게 처분할지 아버지가 결정할 것”이라는 식의 냉정한 시선이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달려갑니다. 아들이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소리칩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아들에게는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말할 틈조차 주지 않고, 이미 축제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미친 듯한 기쁨’이고, ‘분별을 넘어서서 쏟아지는 은혜’입니다.

이 지점에서 바리새인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오래 신앙생활한 이들도 때로는 이 은혜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아무런 공로도 없는 자가 어떻게 이렇게 쉽게 잔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으로 인해 하늘에서 더 크게 기뻐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공로주의 관념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단 한 가지,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우리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아버지의 결론입니다.

또 한편, 아버지는 형을 향해서도 여전히 사랑스럽게 “얘”라고 부르며, 따뜻하게 진심을 전합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었다”고요. 이것이 결국 형에 대한 아버지의 진단입니다. “너는 원래 풍성함 안에 살고 있었어. 그런데 왜 굳이 외롭고 결핍된 자세로 분노하고 있니?” 하는 물음입니다. 이는 “나의 영적 형편”을 점검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혹시 교회 안에서 오래 있고, 봉사도 많이 했는데, “왜 내게는 별다른 잔치가 벌어지지 않을까?”라고 섭섭해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만약 그렇다면, 이미 아버지 집 안에 머무는 기쁨을 놓쳐버린 것이 아닌지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날마다 잔치와 같은 풍성함이 열려야 하는데, 정작 우리는 그 풍성함을 감사함으로 누리지 못하고, 되려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들에게 질투를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탕자의 비유는 신앙생활의 두 축, 즉 ‘회개’와 ‘용서’를 동시에 구체화해 줍니다. 둘째 아들의 회개와,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용서가 만날 때 펼쳐지는 잔치가 이 비유의 절정입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에게도 똑같이 열려 있는 아버지의 마음이 마무리를 장식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주어진 답변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15장 2절에서 시작된 이 질문, “왜 예수는 죄인들을 영접하는가?”에 대한 최종 해명은 32절의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가 얻었으니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선언으로 완결됩니다.

이 비유는 오늘날 교회가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도전에 대한 근본적인 지침이 되기도 합니다. 교회 문턱을 낮추고, 회개하여 돌아오는 이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라는 것, 동시에 교회 안에 오래 머무른 이들이 “내게 주어진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잊지 말라”는 두 가지 당부가 계속 울려 퍼집니다. 우리는 각각 인생의 여정에서 ‘둘째 아들’이 되어보기도 하고, ‘첫째 아들’이 되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곳은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자리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성숙한 교회”의 지향점이라고 가르칩니다. ‘탕자’가 용서를 받고, ‘형’이 그 사실을 기뻐하는 공동체가 곧 천국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잃은 자, 방황하는 자가 돌아올 때, 또는 이미 교회에 있던 이들이 스스로 의롭다 여기며 타인을 배척하려 할 때, “아버지의 마음”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 마음은 무언가 특별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먼 거리에 있는 아들이 보일 때부터 달려 나가는 측은함’이며, ‘하늘에 속한 영적 실재와 기쁨을 누릴 줄 아는 관용’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보여주신 복음의 핵심입니다. 또한, 두 아들을 통해 드러난 인간 내면의 다양성을 인식하고, 그 모두를 끌어안는 아버지의 배포를 묵상할 때,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분명한 방향성을 얻게 됩니다.

 “회개와 용서”는 탕자의 비유에서 단순한 종교적 의무나 도덕적 가르침 차원을 넘어, “원래 하나였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풍성함에 다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탕자는 비록 먼 나라까지 갔지만, 아버지가 그를 잊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서는 순간부터 이미 환대와 회복이 시작되었습니다. 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왜 분노하는지, 아버지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에게도 “이미 모든 게 네 것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다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갈등과 오해가 풀어지는 지점들이 생길 것입니다. 서로가 “내 것”을 내세우기보다, “이미 아버지의 것이 우리의 것이며, 우리 모두는 하나의 가족”이라는 진리를 품게 될 때, 비로소 탕자의 비유가 그린 아름다운 잔치가 매일의 삶 속에서도 구현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는 복음이 가진 낯설고도 놀라운 측면을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여전히 마음이 닫혀 있는 이들에게는 “저건 너무 극단적인 이야기 아닌가?” 싶지만, 실제로 복음은 그보다 더 큰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마지막 남은 옷마저 군병들에게 제비 뽑히실 정도로 다 내어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던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가 곧 하나님의 음성이기도 합니다. 이 음성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이들은 더 이상 ‘돼지우리’ 같은 비참함에 머무르지 않고, 아버지의 집이라는 풍성함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의(義)와 노력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매매하려던 형의 태도에서 벗어나, 이미 주어진 은혜를 기뻐하는 자유인으로 살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의 힘이고, 교회의 희망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인용하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죄에 빠지기도 하지만, 또한 그 자유로 인해 언젠가 돌아올 수 있는 길도 열려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로봇과 같은 결정론적 순종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자유롭게 사랑을 선택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 비유에서 탕자는 그 자유를 오용해 방탕하고 고통을 맛보았지만, 결국에는 ‘그 자유’를 다시 쓰면서 아버지께 돌아오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둥켜안고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형에게도 같은 자유가 열려 있습니다. “들어가서 동생을 함께 환영할 것인가, 아니면 밖에 서서 원망과 질투에 빠져 있을 것인가?” 이것도 형의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인간이 자유롭게 ‘참된 사랑’에 참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완성이 곧 “잃었다가 얻은 자로 인한 기쁨”이고, “죽었다가 살아난 자와 함께하는 잔치”입니다.

교회의 사역적 측면에서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돌아오는 자를 제한 없이 맞아들이고,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 진정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도록 권면해야 한다.” 이것이 누가복음 15장을 통해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복음 목회의 모델입니다.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통해 그들을 회개와 구원으로 이끄시고, 동시에 그 광경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다”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모범을, 우리는 계속해서 이어받아야 합니다. 참된 공동체라면, 탕자나 형이나 모두를 아우르며, 무엇보다 아버지의 마음을 심장부에 모셔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결론은 예수님의 음성과 아버지의 음성이 겹치면서 들려옵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음성은 형을 향해, 이미 함께 있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음을 잊지 말라고 일깨웁니다. 이것이 곧 교회가 맞이해야 할 태도입니다. “돌아온 자를 기뻐하라. 원래 함께 있던 자는 이미 기쁨을 누리고 있었음을 상기하라. 그리고 둘 다 아버지의 잔치 속에서 화해하고 하나 되라.” 누가복음 15장, 특히 탕자의 비유는 끝없는 분열과 경쟁, 편가르기가 난무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역설적인 환대와 기쁨을 실제로 보여줄 수 있는지 가장 생생하고도 은혜롭게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복음의 핵심이자, 우리가 늘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2. 탕자의 비유를 통해 본 소유와 하나 됨의 영성

탕자의 비유에서 핵심 갈등 지점은 ‘소유’와 관련된 문제로부터 시작됩니다. 둘째 아들은 “내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했고, 아버지는 그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이어지는 누가복음 15장 31절에서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깊이 묵상해 보면,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분리되는 근본 원인은 ‘소유의 잘못된 이해’와 ‘물질 혹은 자유에 대한 왜곡된 해석’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재물이나 권리를 ‘내 것’으로 붙잡으려 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가난해지고, 공동체를 떠나 방황하는 신세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통해, 교회가 ‘소유’ 문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자주 역설합니다. 교회는 재정과 인력, 여러 부동산 등을 포함해 점점 더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가 오히려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부유해질수록, 탕자가 재물을 잘못 쓴 것처럼, 공동체 안에도 소유 분쟁이 일어날 위험이 커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철저히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의 것이 곧 우리의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것이 곧 아버지의 것”이라는 의식을 지키지 못하면, 어느 순간 “내 몫을 달라”며 교회를 떠나는 개인적·집단적 탕자 현상이 빚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교회 구성원 전원이 “우리는 이미 아버지 안에 머물며, 그분께서 주신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존재”임을 늘 상기해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가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은 종종 ‘내가 자유롭게 살아야겠다’는 이름 아래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고, 소유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려는 길로 갑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국 돼지의 밥통조차 채우지 못하는 궁핍함과 비참함으로 이어집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비슷한 역설이 발견됩니다. 물질적 풍요를 목표로 삼아, 내 소유와 권리를 최우선으로 챙기겠다는 태도가 만연해지면, 사회 전체가 파편화하고, 깊은 공허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곤 합니다.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내 교회, 내 재산, 내 지분”으로 생각하는 순간, 이미 아버지 집의 본질적인 풍성함과 기쁨을 놓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집은‘함께 있음’이 전제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형의 사례가 이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형은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고, 재산을 허비하지도 않았으나, 정작 내면에는 가난이 있습니다. 그는 어느 순간 “아버지가 나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준 적 없다”며 분노를 터뜨립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었는데, 왜 몰랐니?”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곧 ‘소유’라는 개념이 이미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왜곡된 시선은 “아버지의 것은 아버지의 것, 내 것은 내 것”으로 구분 짓거나, “내가 이 정도 했으니 마땅히 받을 몫이 있다”고 요구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탕자와 형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보여주시는 원래 질서는 “내 것이 다 네 것이고,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으니, 실상 모든 것을 누릴 권리가 있었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미 모든 것을 주셨다”는 복음의 진술과도 일치합니다. 창조 때부터 사람을“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땅과 바다와 생물을 다스릴 권한을 허락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생명과 지혜, 그리고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내 몫”을 주장하다가 오히려 분리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원래 전부를 누릴 수 있었는데, “이만큼이라도 당장 내 것으로 확정해야겠다”는 조급함과 왜곡된 소유 욕망 때문에, 오히려 풍성함을 잃어버리고 고립되는 비극을 자초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뿐 아니라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적용됩니다. “나는 봉사도 많이 했고, 헌금도 많이 했고, 성경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내게 이 정도 복은 주셔야 한다”는 식의 계산이 깔리면, 우리는 형의 길로 빠져듭니다. 반면, “나는 내 마음대로 살겠으니,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다. 스스로 내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태도는 탕자의 길로 빠져듭니다. 그러나 이 두 길이 모두 위험함을 탕자의 비유가 증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분리되어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있음’의 기쁨과 자유, 그리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는 선언이 뜻하는 바를 온전히 이해하기 전까지는, 언젠가 탕자처럼 비참한 현실에 부딪히거나 형처럼 분노로 가득 찬 마음에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이 비유가 제시하는 최종 해법은, “다시 아버지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처럼 스스로 죄를 깨닫고 돌아오는 길도 있고, 첫째 아들처럼 오해를 풀고 아버지의 마음을 재발견하는 길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회개와 용서”라는 은혜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고, 동시에 “소유에 대한 근본적 인식”이 새롭게 됩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 얻어낸 것”이라는 생각이 “원래 아버지께서 다 주신 것이었구나. 그리고 그것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와 함께 누릴 것이었구나”라는 인식으로 전환됩니다. 이런 전환이 일어나면, 교회는 내부적으로 더 강한 결속과 풍성함을 누릴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나눔’과 ‘환대’를 실천하는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부자가 삼대를 못 간다”는 속담이 말해주듯이, 물질이 대물림되면서도 그 정신이 함께 물려받지 못하면, 결국 가정이든 공동체든 부패하고 분열하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비단 세속 사회뿐 아니라,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교회가 세속적 성공으로 인해 재정적, 인적 부흥을 경험했다 해도, “나는 형이 아니야, 나는 탕자가 아니야”라고 방심하는 순간, 어느새 그 풍성함이 죄악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재물이 나빠서가 아니라, 재물에 대한 우리의 집착과 태도가 죄를 부추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언제나 “내가 진정 청지기로 살고 있는가?”를 묻고, “이미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하시며, 모든 것을 주셨으니, 나는 그걸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를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동시에 ‘회개와 용서’의 영성은,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교회 안에서 어느 누가 보아도 큰 죄를 지은 사람이 돌아올 때, 우리는 그를 정죄하기보다 “그가 돌아왔으니 다행이고 기쁘다. 우리 함께 잔치를 벌이자!”는 환대의 태도를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결코 ‘죄를 방치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은혜가 이제 그를 덮었으니, 우리 모두 기쁨으로 그의 회복을 축하하자”는 의미입니다. 만약 교회가 이런 태도를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네가 이렇게 큰 죄를 저질렀으니 충분히 벌을 받아야 해”라는 식으로만 나온다면, 그것은 첫째 아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잃었다가 찾은 자, 죽었다가 살아난 자로 인해 더욱 큰 기쁨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복음의 정신대로 살려면, 이런 환영의 관대함이 필수적입니다.

더욱이, 죄인들이 돌아올 뿐 아니라, 이미 교회 안에 있던 이들도 수시로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때로 “율법과 의무에 충실하다”는 외양을 갖췄어도, 실제로는 아버지 마음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의(義)를 신앙의 척도로 삼으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아무리 오래 교회에 있었어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결여되어 있으면, 잔치 소식을 듣고도 오히려 심술이나 질투가 올라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형이 처한 상황입니다. 교회는 탕자를 환영함과 동시에, 형이 아버지를 오해하고 있다면 그 오해를 풀어주고, “너도 이미 풍성함 안에 있으니 내적인 자유와 기쁨을 누려라”라고 권면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 됨’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해지는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모든 것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 결정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은 옷까지 제비 뽑혀 빼앗기셨다는 복음서의 기록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가진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극단적인 희생을 상징합니다. 곧 누가복음 15장 31절의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는 선언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소 성취해 보이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그 은혜와 사랑을 믿는다면, 더 이상“이건 내 것, 저건 네 것”을 칼같이 구분하며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더 많이 가진 이가 더 많이 내어주고, 더 적게 가진 이가 함께 기뻐하며, 모두가 한 아버지의 집에서 잔치를 누리면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거룩한 교회 공동체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경제학”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경쟁과 독점, 배제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는 그와 다른 원리, 곧 ‘돌아오는 자의 회복을 환영하고, 이미 있는 자의 충만함을 재확인하며, 모두가 아버지의 풍성함을 함께 즐기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편)”라고 노래했고, 사도행전 2장에도 초대교회가 재산을 서로 통용하며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곧 “소유” 문제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영적 혁신’이 일어날 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탕자의 비유는 이 혁신이 ‘아버지의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 본 소유와 하나 됨의 영성은 다음과 같은 핵심을 가집니다. 첫째, 우리는 원래 아버지 안에 거할 때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분깃’을 주장함으로써 하나님과 분리되고, 자칫 비참한 현실에 빠질 수 있습니다. 셋째,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설 때, 아버지는 조건 없이 우리를 맞이하시며, 잃었다가 얻은 자로 인해 큰 기쁨을 베푸십니다. 넷째, 이미 교회 안에 있던 형 같은 이들도, 사실상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면 분노와 좌절에 빠질 수 있기에, 진정한 회개와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다섯째,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이 실상은 아버지의 것이고, 그래서 나 혼자만의 소유가 아닌 공동체적 축복임”을 인식함으로써, 서로 나누고 배려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를 실제 교회 생활에 적용할 때, 구제나 선교 사역, 혹은 여러 가지 협력의 장에서, “내 것은 내 것”이라는 이기적 태도가 아니라, “함께 누리고 함께 쓰자”는 열린 태도가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이런 영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신자들 간의 갈등이 생겼을 때 쉽게 분쟁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집은 언제나 풍성하며, 또 누군가 돌아올 때마다 새 잔치를 벌일 정도로 충분히 넉넉하다”는 것을 봅니다. 이 믿음을 놓치지 않을 때, 교회는 ‘소유를 통한 분쟁’보다 ‘함께 나누는 기쁨’을 훨씬 더 크게 경험하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강조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통제 없이 멋대로 살고자 먼 나라로 떠났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었고, 결국 처참한 노예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께 돌아오자, 오히려 풍성한 자유와 축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라고 하신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절대적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존재의 근원을 회복하고, 이미 허락하신 모든 풍성함 안에 참여하는 삶’이 참된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없이 믿음의 공동체를 이런 자유 안으로 초청해야 합니다. 이 자유는 ‘회개’로부터 시작되고, ‘무조건적인 용서’에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형이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아버지 마음을 새롭게 알아갈 수 있고, 탕자 역시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두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이 곧 복음의 능력입니다.

탕자의 비유가 사람들에게 시공을 초월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곧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탕자의 길’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물질적 탕진일 수도, 영적 방황일 수도, 인간관계의 파탄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 어느 때는 형처럼 “나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인정받지 못하지?” 하고 억울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에서 우리를 묶고 있는 근본 문제가 “아버지와의 분리”임을 깨닫는 순간, ‘회개’라는 통로가 열리고, ‘용서’라는 선물이 주어집니다. 더 나아가, ‘소유’에 대한 시야마저 확대되어, “원래부터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었고, 우리 모두가 그것을 함께 누려 왔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 깨달음에 도달하면, 우리는 자유롭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자유는 “무소유”가 아니라, 사실상 “모든 것을 소유한 상태”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는 역설이 이루어지는 지점입니다.

이것이 탕자의 비유를 통해 누가복음 15장이 보여주는 복음의 비밀이자, 교회 공동체가 배우고 실천해야 할 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질문, “왜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으시는가?”에 대한 대답은, “그들이 돌아왔기 때문이며,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으면,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얻은 자들이며, 서로에게 분노하거나 질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소유’와 ‘분리’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 바로 탕자의 비유가 던져주는 최고의 교훈입니다.

오늘도 교회는 이 메시지를 통해 계속 새로워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묵상하면서, “나에게는 지금 탕자의 모습은 없는가?” “나는 혹시 형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공동체 안에 소유를 둘러싼 분쟁이나 분리는 없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아버지께 돌아가야 한다. 그분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그 마음 안에서라면 죄인도, 형도, 모두가 함께 즐거워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직접 들려주신 최고의 복음 이야기 중 하나인 탕자의 비유를, 교회가 자기 삶으로 구현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구현의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기적 같은 환대와 연합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가 일관되게 전해온 메시지도 바로 이것입니다. “돌아오는 자, 혹은 그 자를 시샘하는 자, 모두를 품어내는 아버지의 마음을 배움으로써, 교회가 진정한 가족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탕자의 비유가 가르쳐 준 가장 아름다운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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