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과 구원 – 장재형(장다윗)목사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설교한 창세기 3장과 4장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타락, 사탄의 정체, 그리고 성도의 대응’에 관하여 정리한 내용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그리고 3장과 4장의 ‘타락’, 더 나아가 이사야 14장, 에스겔 28장, 요한계시록 12장 등 관련 구절을 모두 아우르면서, 궁극적으로 주기도문 중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는 청원과 연결하여, 장재형목사가 전달하는 교훈을 심층적으로 다룬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어떻게 사탄이 발생했고, 그 사탄이 인간을 어떻게 유혹하는지, 그리고 성도는 어떠한 태도로 맞서야 하는지에 대해 다루었다. 

1. 인간의 타락과 사탄의 전략 

장재형목사가 창세기 3장과 4장을 집중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강조하는 까닭은, 바로 인간의 타락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그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낱낱이 파악하기 위함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기록을 담고 있다. 하나님은 흑암 중에 빛을 창조하시고, 하늘과 땅을 분리하시며, 바다와 땅, 그리고 각종 생물을 지으셨다. 그리고 그 모든 창조의 정점으로 인간을 지으셨는데,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 1장과 2장의 핵심이다.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1,2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이후 등장하는 인간의 타락(창세기 3장)과 그 후손인 가인의 문제(창세기 4장)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 전제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창조 자체가 선하고 완전하셨으며, 범죄와 사망이 없었던 세계를 하나님이 지으셨음을 먼저 알아야, 그로부터 어떤 ‘변질’이 일어났는지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세기 3장으로 들어서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존재가 등장한다. 그것은 곧 “여호와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에서 가장 간교한 뱀”이다. 이 뱀은 인간, 곧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와서 ‘하나님께서 정말로 모든 동산 나무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마음에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장재형목사는 이 질문이야말로 인간과 사탄의 접점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하느냐,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다른 기준을 세워서 불순종하느냐가 결정되는 갈림길이기 때문이다.

뱀은 하와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지만, 동시에 매우 매혹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기에, 그대로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두려움과 경계심이 생긴다. 하지만 뱀은 그 두려움을 무너뜨리고, “너희가 죽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 선동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에서 사탄의 작동 원리와 특징을 밝힌다. 사탄은 전적으로 자신만의 악한 목적을 위해 거짓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킨다. 어쩌면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나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결과적으로 성도를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위치로 끌어당긴다.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3장에서 하와의 반응에 주목한다. 하와는 이 선악과를 ‘보았을 때 먹음직스럽고 탐스럽게 보였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이 났다’고 한다. 여기에는 ‘보는 것’(시각적 자극)→‘손으로 만지는 것’(직접적 접근)→‘입으로 먹는 것’(실제 행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죄의 메커니즘이 언급된다. 죄는 종종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온 인격을 더럽히며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라는 주기도문의 청원과 긴밀히 연결된다고 말한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시험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교만이며, 사탄이 날카롭게 찌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 말씀에 순종해야 복을 누리는 존재로 지음 받았으나,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자리, 스스로 기준이 되는 자리에 올라가려 할 때, 결국 뱀의 유혹에 빠진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설파하는 핵심 요지다.

창세기 3장의 이런 흐름 속에서, 아담과 하와는 결국 금지된 열매를 먹고 만다. 그 결과로 나타난 첫 번째 징후는 무엇인가. 서로를 향해 수치를 느끼고 벌거벗었음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해 입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실 때, ‘무서워 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죄가 가져다주는 결과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상징이다. 죄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낳고(영적 수치심), 그로 말미암아 인간 스스로가 자기 방어책을 만들며(무화과잎 옷), 결국 그 임재에서 멀어지게 한다(숨어버림).

창세기 3장 마지막은 더 결정적인 심판이 선포된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라’,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아졌으니 그가 생명나무에도 손을 뻗쳐 영생을 얻지 못하도록 그 길을 막으셨다’ 등의 구절은, 인간이 ‘불순종’과 ‘자기중심적 교만’을 선택함으로써 얻게 된 비극적 결말을 보여준다. 사탄의 가장 큰 거짓말은 ‘정녕 죽지 않는다’였지만, 실제로는 ‘정녕 죽게 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있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타락은 단지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순간에 그치지 않고, 이후 모든 인류의 원죄로 이어졌기에, 오늘날 우리도 그 영향권 안에서 태어난다는 점이다.

창세기 4장으로 넘어가면, 아담의 후손인 가인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살인에까지 이른다. 이는‘자기중심적 욕망’이 얼마나 급속도로 번져나가 죄와 죽음의 열매를 맺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장재형목사는 가인의 타락을 ‘사탄이 일으킨 타락의 또 다른 확장’이라고 설명한다. 창세기 3장에서 개인적 차원으로부터 시작된 타락이, 창세기 4장에서는 형제 사이의 살인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상에 퍼져나간다. 이미 죄가 들어왔으니, 인간의 마음은 ‘뱀의 거짓말’에 점점 더 휘둘리게 되고, 결국 형제 간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죄악으로 나아간 것이다.

성경을 한 장씩 읽어나가다 보면,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하는지 잘 드러난다. 하나님은 그가 제물을 드릴 때 이미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기록한다.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셨는지에 관해서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장재형목사는 그 중심 동기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인에게서 드러난 것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태도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마음의 중심이 애초부터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만족을 위한, 혹은 의무감으로 드리는 제사였다면, 당연히 하나님은 그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 인한 시기와 분노가 동생 아벨을 죽이는 큰 죄악으로 이어진다.

창세기 3장과 4장의 이런 내러티브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죄의 시작은 미묘한 의심이지만, 그것이 마음에 뿌려지고 방치되면 교만과 거짓 해석, 자기중심적 판단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인간은 그 결과로 영적 죽음, 타인과의 갈등, 심지어 살인까지도 저지르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모든 성도가 바로 이 기원적 타락의 양상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사실을, 창세기 3장과 4장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이 죄의 뿌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큰 기적이고 사랑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결국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셨던 완전한 계획에서 멀어졌으나, 그 계획을 회복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다는 대역사가, 구원의 본질이 되기 때문이다. 즉, 창세기 3장에서 뱀이 도입한 ‘하나님처럼 되려는 야심’을 예수님이 빌립보서 2장 말씀처럼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심’으로 정면으로 깨뜨려 버리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낮아지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사탄이 부추긴 교만을 이겨내셨다. 그러므로 구원 역시 ‘교만을 버리고, 자기를 낮추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비로소 열매 맺게 된다.

이런 차원에서,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3장과 4장을 공부하는 목표 중 하나가 사탄의 전략과 인간 심성의 취약점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주님 앞에서 회개함으로써, 더 이상 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실천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공동체 안에서 진리의 빛을 조명받고, 스스로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점검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 과정에서 항상 “하나님께서 정말 이것을 원하시는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며, “주님, 저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날마다 자신을 살피는 태도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교만은 사탄이 뿌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고, 그것은 모든 죄와 타락을 유발하기 때문에, 성도는 늘 깨어 기도하며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이다.

2. 사탄의 정체와 타락한 천사들

장재형목사는 뱀의 정체가 결국 ‘사탄’, ‘마귀’, ‘용’이라고 계시록 12장에 분명히 드러난다고 해설한다. 뱀은 그저 상징적인 동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역한 타락한 천사장, 혹은 천사 무리의 두목이 실체화된 존재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창세기 3장의 뱀을 단순히 동물적인 뱀으로만 읽으면, 성경 전체가 말하는 구원 역사를 놓칠 수 있다. 사탄, 루시퍼, 마귀, 용, 온 천하를 꾀는 자 등 다양한 호칭들이 성경 곳곳에서 나타나지만, 그 근원은 동일하다. 이 존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중 하나이지만, 스스로의 지위를 떠나 교만을 품고 ‘가장 높으신 이와 같아지려고’ 시도한 결과, 타락한 천사 무리가 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에도 언급된 ‘바벨론 왕’ 혹은 ‘두로 왕’에 대한 비유가 사실상 사탄의 모습, 특히 그 왕들의 배후에 있는 ‘타락한 천사’의 형상을 가리키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사야서 14장의 표현을 자세히 보면,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라고 적혀 있다. 이 ‘계명성’(라틴어 성경에서는 루시퍼Lucifer로 표현)은 원래 하나님 옆에서 빛을 발하던 천사장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아지리라”라고 마음에 품고 반역을 꾀한다. 그것이 결국 사탄의 본질적 죄이며, 그가 나락으로 떨어진 가장 큰 이유다.

에스겔 28장에서도 두로 왕에 대한 비유 가운데, 원래 ‘기름부음 받은 덮는 그룹’으로서 에덴동산에 있던 자가 그 무리와 함께 타락하여 결박당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원초적 타락’이 인간보다 먼저 천사 세계에서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우리는 성경을 통해, 단순히 인간만 타락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유혹하고 무너뜨리고자 하는 영적 세력이 존재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가 영적 전투를 감당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계시록 12장에서는 큰 용이 내어쫓기는데,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분명히 명명한다. 이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질 때, 하늘의 별 3분의1을 끌고 떨어졌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타락한 천사 무리가 그만큼 많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탄은 혼자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하늘 군대 중 3분의1가량이 함께 반역한 것이다. 이들이 공중 권세를 잡고 지금도 끊임없이 인간에게 유혹과 미혹을 던지며, 때로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앞세워 역사하기도 한다. 에베소서 6장에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라고 한 말씀이 바로 이 맥락을 가리킨다.

장재형목사는 이 영적 세계를 알지 못하면, 세상의 많은 문제를 단순히 사람 간 갈등이나 제도적 모순으로만 치부하다가 놓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실제로 역사의 현장에는 사탄이 틈탈 자리를 찾아 권세자들과 악의 세력을 통해 일을 꾸민다.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힐 때, 혹은 바벨론 왕이나 아시리아 왕이 주변국을 정복하며 잔혹하게 백성을 학살할 때, 그 배후에는 사탄의 본성인 ‘교만과 폭력’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사탄은 언제나 자신을 높이고 우상숭배를 조장한다. 구약 시대에 수많은 우상들이 있었던 것도, 결국 사탄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기 위한 시도의 한 모습이다.

바알 숭배는 성적으로 물란하게 만들고, 몰렉 숭배는 심지어 자녀를 인신제사로 바치는 끔찍한 행위를 유도한다. 금송아지 숭배는 재물을 중심에 두는 맘몬주의를 대표하는 상징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모든 우상 뒤에 “사탄의 교만과 폭력성이 깔려 있다”고 말한다. 사탄은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과 경배를 자신이 바꿔 받으려는 시도로 우상을 발전시켰고, 인간은 그 유혹에 넘어가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고 몰렉 앞에 자식을 불태워 바치는 무지하고 잔혹한 행위를 범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사탄의 꾀임은 단지 구약 시대만이 아니라 신약 시대, 그리고 오늘날에도 지속된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셨을 때, 사탄은 친히 찾아와 세 가지 시험을 걸었다.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거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봐라. 그러면 천사들이 너를 받들어 다치지 않게 할 것이다.” 또 “내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겠다”는 식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사탄이 인간을 유혹할 때 쓰는 기본 패턴, 즉 ‘육체적 욕구(먹을 것), 명예나 인기(기적을 통한 선망), 물질과 권세(세상 왕국)’를 흔들며, 결국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작동 원리임을 지적한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고, 오로지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일축하셨다. 결국 사탄은 패배하여 떠나갔고, 예수께는 천사들이 수종을 들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성도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완전히 순종할 때, 교만과 욕심을 부추기는 사탄의 간계를 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영적 전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내가 하나님처럼 선악을 판단하겠다”고 하거나, “내가 말씀보다 더 우위에서 스스로 기준을 세우겠다”고 할 때, 사실상 사탄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는 셈이 된다.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며,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저가 귀신 들렸다”거나 “안식일을 범한다”고 비난하는 모습이야말로, 종교적 포장을 했지만 실제로는 사탄의 편에 서 있는 전형적인 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까지 말씀하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창기나 세리처럼 스스로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는 이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그 자비와 사랑을 경험케 하셨다.

유다서 1장 6~7절도 타락한 천사들, 즉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자들이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혔다고 선언한다. 일부 타락한 천사는 즉시 결박당했고, 아직 돌아다니며 인간을 유혹하는 악령들도 있다. 욥기 1장과 2장에 보면, 사탄이 ‘참소자’로 등장한다. 그는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그에게 재물과 건강을 다 빼앗아보십시오. 분명 하나님을 저주할 겁니다”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하나님은 욥에게 시험을 허락하시고, 욥은 극심한 고난을 겪는다. 이는 인간의 삶 속에서 사탄의 참소와 고난이 불가피할 때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욥은 끝내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사탄의 참소가 거짓임을 증명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이 하나님께서 왜 일부 타락한 천사들을 당장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고, 일정 부분 그들의 활동을 허용하시는지 설명하는 예라고 주장한다. 사탄이 “인간이 어찌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겠냐. 다 조건이 있으니까 믿는 거다”라는 식으로 참소할 때, 하나님은 그 고난을 허락하심으로써 오히려 참된 믿음의 증거를 낳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인간 편에서 볼 때 참으로 고통스럽고 난해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왜 하나님이 당장 사탄을 없애지 않으시나?”라고 탄식하게 될 수 있지만, 욥기의 결론을 보면, 욥은 이전보다 더 깊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물질적 축복도 회복되며, 무엇보다 영적인 성숙에 이르게 된다. 우리 역시 고난과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만일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깨어 있으면, ‘사탄의 참소’를 떨쳐버리고 승리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기도의 실제 의미다. 장재형목사는 “우리에게 시험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시험 속에서 승리하게 해달라는 간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사탄은 ‘루시퍼,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라 불리던 자가 자기 지위를 떠난 타락한 천사요, 지금도 온 천하를 돌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 대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이미 그 정체가 폭로되었고, 최종 심판이 예비된 존재다. 장재형목사는 “우리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사탄은 반드시 패배한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누가복음 10장)고 말씀하셨을 때, 이미 그는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성도는 이 승리를 믿고 나아가 ‘예수의 이름으로’ 사탄을 물리칠 권세가 있다. 그러나 이 권세는 예수님을 닮아 겸손히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사탄이 타락한 방식이 ‘교만’이었다면, 성도는 ‘겸손으로 자기를 낮추는 예수의 길’을 따르는 방식으로 사탄을 이기게 되는 것이다.

3. 성도의 대응과 영적 승리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결론은, 궁극적으로 성도는 주님의 가르침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사탄의 권세에 대항하고 이겨야 한다는 점이다. 앞선 창세기 3장과 4장이 보여주는 인류 타락의 시작, 그리고 이사야 14장이나 에스겔 28장에 나타난 사탄의 교만과 심판, 욥기의 시험, 계시록 12장의 영적 전쟁 등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사탄의 거짓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이 신약에 와서 완전히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실패를 뒤엎는 ‘둘째 아담’으로 오셔서 사탄의 유혹을 모두 물리치셨고, 십자가에서 완전한 희생 제물로 죽으심으로써, 죄에 대한 형벌을 대속하셨다. 장재형목사는 “이 승리의 복음이야말로,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자,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특권”이라고 해석한다.

주기도문에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것은 “하나님, 저를 뱀의 유혹으로부터, 사탄의 속임수로부터 보호하시고, 제 마음 안에 꿈틀대는 교만과 자기중심적 욕망을 성령으로 제어하여 주옵소서”라는 고백과도 같다. 장재형목사는 “성도는 날마다 이 기도를 실제적으로 드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이라 해도, 마음 한편에서 자기를 높이려는 ‘사탄의 DNA’가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그 욕망이 깨어날 때마다, 믿음의 사람들이 서야 할 자리는 “주님, 제가 주인 자리에서 내려오겠습니다. 오직 주님이 제 인생의 주인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겸손의 자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실 정도로, 순종은 때때로 매우 고통스럽다. 장재형목사는 이 기도가 신앙생활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해설한다. 진정한 순종은 ‘내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서 시작되는데, 그것이 쉬운 일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귀는 종종 가장 강렬하게 우리의 약점을 자극”하고, “단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거나 “이 정도쯤이야 괜찮다”는 식의 달콤한 거짓을 속삭인다. 그때 성도는 예수님처럼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시옵소서”라는 태도를 취해야 하며, 이는 말처럼 간단치 않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건전한 영적 권면을 받으면서, 계속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야 할 피조물이다. 그런데 사탄은 계속해서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스스로 왕이 되라’고 유혹한다. 교만의 길은 항상 달콤해 보인다. 그러나 그 끝은 파멸과 영적 죽음이다. 반면 겸손의 길은 처음에는 좁고 험한 길이지만, 결국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이 그 길을 걸어가셨고, 부활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이 주장은 빌립보서 2장 6~11절이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정확히 상통한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스스로 낮춰 종의 형체를 취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다. 이 순종과 겸손이 예수 닮기의 본질이며, 사탄은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 가치다.

그러나 성도가 이 사실을 머리로만 알고 살아가다 보면, 실제 삶에서 사탄의 유혹에 또 넘어질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막기 위해 ‘성령 충만’과 ‘말씀 충만’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광야 시험에서 매번 “기록되었으되…”라며 신명기 말씀으로 사탄의 거짓을 쳐부수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창세기 3장과 4장이 보여주는 인간 타락의 본성을 인정하고, “하나님, 저는 약합니다. 제 안에도 사탄이 뿌린 교만과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이 저를 온전케 하옵소서, 저를 시험에서 건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살아있고 힘 있게 우리의 영혼에 적용해 주신다.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 보며, 자기중심적 동기를 지속적으로 회개할 때, 비로소 교만이 무너지고, 하나님 중심의 판단과 선택이 가능해진다.

장재형목사는 또 하나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교회 공동체가 함께 있다.” 사탄은 종종 개인을 고립시켜 시험에 들게 하려 한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염려하고, 혼자 해결하려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말씀과 멀어지기 쉽다. 그럴 때, 가까운 믿음의 동역자나 목회자, 혹은 소그룹 리더, 지체들에게 마음을 나누고 기도를 요청하면, 빛 가운데 놓여지게 된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물러가듯, 사탄은 ‘숨김’과 ‘은밀함’에서 더욱 기세를 부린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격려하며 중보 기도하면, 마귀가 틈탈 자리가 없어진다. 야고보서에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기도하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원리 때문이다.

특히 주기도문을 함께 암송하고 기도할 때,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이 한 줄의 문장이 얼마나 강력한 영적 무기가 되는지 깨닫게 된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이기에, 거기에 담긴 영적 의미가 크며, 또한 온 교회가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일 때, 성령이 주시는 위로와 능력이 더욱 크게 임한다. 장재형목사는 “주기도문은 교회 공동체의 기도이며, 동시에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 교회는 함께 한 마음으로 사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영적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기도와 말씀의 훈련을 거듭해 나갈 때, 성도는 실제 삶에서도 죄와 교만을 이기는 경험을 하게 된다.

종합해보면, 창세기 3장과 4장을 통해 시작된 인간의 타락과 사탄의 유혹, 그리고 사탄 자체가 어떻게 타락했는지(이사야 14장, 에스겔 28장, 계시록 12장) 살펴보는 일은, 성도가 영적으로 깨어 있기 위한 필수적 기초다. 사탄은 인간이 가진 본연의 연약함을 악용하여, ‘내가 선악을 판단하겠다’는 태도, 곧 교만으로 끌고 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낮아지심으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그 길을 완전히 뒤집으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에 동참함으로 사탄을 대적할 수 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간구하며, 말씀 안에 거할 때, 사탄은 더 이상 근본적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우리의 싸움은 이미 승리한 싸움이다. 주님이 모든 ‘교만’을 깨뜨리셨고,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다.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사탄이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으므로 긴장해야 한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빛이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니, 어둠은 결코 이기지 못한다.” 이 확신이 성도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때, 우리는 사탄을 결박하고, 죄를 떠나 자유케 되는 은혜를 맛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미 예수님이 승리하셨으나, 그 승리를 내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날마다 말씀 묵상과 기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죄를 회개해야 하고, 예수님이 완성하신 십자가 구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성령을 힘입어 거룩을 추구해야 한다.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고, 우리 신앙생활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열쇠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장)라는 권면이야말로,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최강의 무기다. 예수님의 마음은 결코 교만하지 않았고, 끝까지 순종하심으로 승리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칫 잘못된 자기 확신이나 독선에 빠지지 않도록 늘 자기를 점검해야 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선악의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면서, 자신은 피조물로서, 자녀로서, 청지기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옳다.

장재형목사는 마지막으로, 사탄에 대해서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반대로 사탄의 존재를 무시하는 극단에 치우치지 말라고 당부한다. 사탄은 분명 인간의 적이요, 유혹자이며, 세상의 왕들과 권세자들을 통해 역사하기 때문에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승리를 확신할 수 있기에, 사탄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낮추시는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며, 그 말씀에 따라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은 사탄이 어떻게 손 쓸 수 없다”는 결론이다. 여기서 더욱 강조되는 것이 “주기도문의 능력”이다. 그 기도의 마지막 문장,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야말로, 영원히 참된 주권자가 누구이신지를 고백하는 믿음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할 때, 창세기 3장과 4장의 타락 서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매일 반복될 수 있는 인간 마음의 상태이며, 교만과 불순종이 어떻게 스며들어 극단적 파괴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경고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 계획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선포하기도 한다. 인간이 원래 창조되었을 때의 거룩함을 회복하도록, 하나님은 사탄의 모든 궤계를 물리치고,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시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러니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면, 교만 대신 겸손, 불순종 대신 순종, 어둠 대신 빛 가운데로 걸어가게 된다”고 역설한다. 그 길을 따라갈 때마다, 우리는 매일 시험 가운데서도 승리하며, 결국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는 곧 모든 성도가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주기도문의 청원을 가볍게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로 마무리된다. 장재형목사는 “우리는 늘 말씀과 기도로 무장해야 하고, 공동체 안에서 빛 가운데 서로 교제하며, 교만의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할 때, 사탄은 역사의 한 구석에서 아무리 발악해도, 궁극적으로는 패배한 존재이기에 우리의 길을 막지 못한다. 오늘날 세상이 혼탁하고, 가치관이 다원화되어 있으며, 교회 역시 혼란을 겪을 수 있지만, 오직 말씀에 근거하여 ‘선악을 판별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한다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전하려는 결론은 간단하다. “창세기 3장과 4장의 상황을 날마다 묵상하라. 그리고 사탄이 교만 때문에 타락한 이사야 14장, 에스겔 28장, 계시록 12장, 그리고 사탄에 맞서 싸운 욥기의 사건과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잊지 말라. 주기도문을 부지런히 암송하고 실제 기도로 삼아, ‘시험에 들지 않게’ 말씀 안에서 깨어 있으라. 그렇다면 아무리 사탄이 유혹해도,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성도들에게 전하는 분명한 권면이자, 창세기 3장과 4장을 바라보는 핵심적 관점이다. 교만으로 추락한 루시퍼와 달리, 예수님은 극도로 자신을 낮추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다. 이 대조가 성도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스스로 높아지면 결국 스올의 구덩이로 떨어지지만,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을 높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이 사실을 끝까지 붙들고, 교만의 시험을 이겨내어 하나님의 자녀다운 열매를 맺는 길에 모든 성도가 함께 서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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