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은혜, 오직 믿음 – 장재형목사

1. 오직 은혜로만

로마서 4장 9-12절에 나타난 바울의 논지는 우리의 구원과 의로움이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졌다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교회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칫 놓치기 쉬운 핵심 진리이기도 하다. 바울은 그 예로 아브라함을 들어 설명한다. 특별히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롬 4:9)는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이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은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여기에 담긴 영적 의미를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인간 편에서의 율법적 노력이나 종교적 의식은 결코 죄에서 자유롭게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만이 죄인 된 인생을 의롭게 만든다는 복음의 원리가 선명히 부각된다.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여러 설교와 저술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했듯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연약하여 스스로의 자격과 공로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든 인류가 죄의 지배 아래 있었음을 바울은 이미 로마서 3장에서 선포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선언함으로써, 율법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 혹은 할례의 유무가 구원의 결정적 조건이 될 수 없음을 드러냈다. 이 전제 위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인정받았던 시점을 상기시킴으로 ‘할례 여부’나 ‘율법 준수 여부’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설명한다.

아브라함에게 할례가 요구된 때는 99세 무렵이었다(창 17:24). 그런데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은 이미 75세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 말씀을 따라갔다(창 12:4).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순종하기 시작했으며, 창세기15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그것이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창 15:6). 즉 아브라함이 의로 인정받은 시점은 그가 할례를 시행하기 24년 전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의로 인정받은 것은 결코 행위나 종교적 의식, 혹은 혈통적 선민이라는 지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그가 이방 땅에서 부름을 받고 무할례 상태였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믿음’을 드러냈고,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의로움을 선물하신 사건이었다.

이 “일방적 선물”이 곧 은혜의 핵심이다. 은혜(헬라어로 χάρις, 카리스)는 받을 자격이 없는 이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호의다. 우리는 구원의 문제를 곰곰이 살펴볼 때, 한없이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책을 면할 길이 없다는 사실에 부딪힌다. 죄인은 속죄가 필요하고, 그 죄의 대가가 치러지지 않은 한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고 선언하였다. 문제는, 죄인 스스로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사람이 죄의 값을 치르려 해도, 이미 죄의 본성 가운데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공로나 의식도 완전한 대속이 되지 못한다. 구약 율법에 따르면 짐승의 희생 제사가 일시적으로 죄의 정결 예식을 상징해주긴 했으나, 그 또한 궁극적이고 영원한 속죄는 되지 못했다(히 10:4).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신 길,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서만 죄에서 해방이 가능해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혈의 공로’로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설교를 통해 자주, 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얼마나 크고도 놀라운가를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율법에 의해 자기 죄가 죄인 줄 알게 되었으나, 율법이 죄인을 의롭게 만들거나 완전히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못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준 앞에, ‘내가 얼마나 의를 쌓아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결국 “인간의 행위로는 불가능”하다는 답을 얻게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구원이 불가능함을 절절하게 깨닫는다. 이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날카롭게 지적한 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갈 2:16)는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 결국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전반에서 이끌어낸 결론은, 우리의 의로움은 ‘나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요, 그리스도의 공로를 수용하도록 초청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은혜가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역사하는 것인가?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이 ‘할례’ 논쟁을 언급하는 맥락으로 돌아가 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선민성’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 대표적 상징이 바로 ‘할례’였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표징으로, 그 의식을 통하여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일부 유대인들은 초대교회 안으로 들어온 이방인들도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이 ‘표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택하시고 우리에게만 메시아를 보내셨다”는 인식 속에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할례)을 통해 비로소 선민이 되고, 그 다음에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시점 자체가 이미 무할례 상태였기에, 결코 할례가 구원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며, 구원이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열방에 열려 있음을 천명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어떤 민족적 우월성이나 의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할례 또한, 이미 무할례 상태에서 받은 ‘의로움’에 대한‘인(印, seal)’ 혹은 ‘확인표’ 역할을 했지, 의로움 자체를 부여하는 원인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세례도 마찬가지다. 세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은 신자가, 자기 안에 이루어진 구원을 ‘예식’으로 공표하는 것이지, 세례 행위 자체가 죄 사함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4장 11절에서 “그(아브라함)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라고 설명하였다. 우리의 신앙적 행위들은 모두 이미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신 구원을 ‘확증’하거나 ‘고백’하는 수단일 뿐, 구원을 ‘획득’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왜 이렇게 절대적인가? 우리는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비유들을 통해 이 은혜의 본질을 더 깊이 음미할 수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 20장)를 보면, 아침 일찍부터 일한 자나, 한낮에 와서 일한 자나, 심지어 하루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온 자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 주인은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고 질문하신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논리나 계산이 아닌 ‘일방적 베풂’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이다. 당연히 아침부터 일한 자가 보기에, 나중에 온 자와 같은 임금을 받는 것은 불공평하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사람이 자랑할 어떠한 ‘특권’도, ‘노력’도, ‘혈통’도 결정적 지위가 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 일방적 은혜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이는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이 “우리가 본래는 다 죄인인데,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고 밝히는 맥락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혹은 개개인의 신앙생활에서 왜 이 은혜가 자주 흐릿해지는가? 로마서 4장의 문제와 갈라디아서 전반의 문제를 살펴보면,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이 은혜를 흐리게 만드는 주요 원인임을 발견하게 된다. 율법주의는 사람의 행위와 공적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최소한 ‘하나님의 은혜 + 나의 율법적 공로’라는 이중적 방식을 추구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시도를 ‘다른 복음’이라고 단언하며(갈 1:6-7), 이는 결국 사람을 죄의 짐에서 해방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율법의 속박 아래에 두게 된다고 경고한다. 은혜를 받지 않으면 우리는 죄의 짐을 벗을 수 없고,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져서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게 되거나, 반대로 율법의 무게에 눌려 절망하게 되는 양극단에 빠지기 쉽다. 한쪽 극단은 자기 의에 도취되어 교만에 빠지는 것이며, 다른 극단은 죄책에 눌려 자신을 절망 속에 가둬두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율법주의적 폐단을 지적하면서,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출발점이자 결론임을 힘주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죄가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게 하려” 한 구원 사건이다(고후 5:21). 죄인이었던 우리가 의인으로 역전되는 이 사건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으로 말미암았다. 이 사랑이 없이,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공로가 구원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결국 은혜는 죄인이 ‘자격 있음’으로 인정받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 자격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겠다” 하시고, 나아오도록 초청해주신 선물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바로 “주님, 저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하는 겸손한 마음이며, 이 마음이 곧 은혜를 체험하는 통로이다.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고 고백한 것도 같은 의미다. 그가 교회를 박해하고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과거(행 7:58, 8:1~3)를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였는지 깨닫게 된다. 그것은 그 어떤 자격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일방적 사랑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했고,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도 아브라함을 예시로 들어 “이 복이 할례자에게만 임하느냐, 무할례자에게도 임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진다(롬 4:9). 그리고 명확히 대답한다.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롬 4:10). 구원이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동일하게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곧 하나님의 은혜는 한 민족이나 한 영역에 제한되지 않고, 죄의 짐에 눌린 모든 이에게 열려 있으며,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은혜 안에서” 완성된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주는 실제적 메시지는 매우 크다. 우리의 과거가 무엇이든,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십자가로써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 더 이상 죄책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미 의롭다” 선언을 받았고, 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어떤 이는 회개와 눈물을 흘리고, 어떤 이는 자유를 경험하며, 어떤 이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린다. 이러한 감격이야말로 참된 은혜 체험의 증거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안에 은혜의 감격이 식고, 대신 형식적 예배나 관행적 신앙 행위가 자리 잡으면, 자연스럽게 “나는 이런이런 것을 했으므로 의롭다”라는 율법적 태도가 고개를 든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지적하듯,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병폐이자, 기독교 신앙이 본질을 잃고 형식화될 때 나타나는 특징이다. 우리의 출발이 은혜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놓치면, 신앙생활은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다. 값비싼 은총이 값싼 은혜로 전락한다는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말도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 것이다. 값비싼 은총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사건이다. 이를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더 깊은 감격과 헌신, 그리고 이웃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품게 된다. 그러나 은혜를 잊으면, 교회 생활은 의무감만 남고, 종교적 습관에 젖어들어 오히려 영적 교만과 배타성이 생겨난다.

로마서 4장 11절에서 바울이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할 때, 그 의도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한 민족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인류의 하나님이시고, 그 구원의 열매를 할례 받은 자나 받지 않은 자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음을 확증하신다. 그것이 바로 “은혜는 경계를 허무는 능력”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의 징표였던 할례가, 신약 시대에는 “이제는 할례가 필요 없다”라는 결론을 주기 위해 존재했다기보다, 오히려 “더 근원적인 것이 있다. 곧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이다”라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예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4장 12절에서 말하듯, 아브라함은 할례 받은 자의 조상이자, 무할례 상태에서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모든 이방인의 조상이 되었다. 그의 역할은 ‘믿음과 은혜’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결정적 예다. 그는 75세 때에 무작정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고,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약속의 땅으로 떠났다. 그 삶은 은혜에 대한 순종이자 믿음이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에 몸을 내맡기고 전진함으로써, 결국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 즉 ‘모델’이 되었다. 이것이 기독교 역사에서 아브라함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적 적용은 분명하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봉사하고,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며 다양한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가 전제해야 할 것은 “이미 받은 은혜”이다. 은혜가 먼저고, 행위는 다음이다. 행위는 은혜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표현이어야 한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교회 봉사나 예배 참여, 심지어 기도와 전도조차도 자칫 ‘자기 의’를 쌓으려는 도구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는 잊힌 채, 인간의 자랑과 교만만 남게 된다.

사실 교만은 은혜를 잊을 때 생긴다. 은혜를 붙들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마음은 겸손해지고, 감사로 가득 차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의 보혈 아니고서는 살 소망이 없는 자였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결코 다른 이를 정죄하거나, 이웃을 무시하거나, 자신이 무슨 대단한 의를 가진 것처럼 착각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죄 사함이 절박하게 필요한 자들이었다’라는 깨달음이 서로를 향한 긍휼과 사랑을 낳는다. 이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화합과 진정한 일치를 이루게 하는 토대가 된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교회는 “은혜받은 자들의 모임”이므로, 결국 은혜에 뿌리를 둔 사랑과 나눔이 공동체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로마서 4장 9-12절에서 바울이 보여주는 신학적 결론은 “구원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다”는 것이며, 아브라함이 이를 증언하는 살아 있는 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 가르침을 통해, 교회 내의 율법주의와 배타주의, 특권의식, 모든 형태의 자기 의를 엄격히 배격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될 때, 교회는 비로소 세상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은혜가 없는 교회 생활은 차가운 형식주의나 인간적 권력 다툼으로 전락하기 쉽지만, 은혜가 충만한 교회는 서로의 허물도 품어주고, 용서와 회개가 넘치며, 사랑으로 충만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는 생명력을 발산한다.

바울이 이토록 “은혜의 교리”를 힘주어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은혜를 깨달은 이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시고, 세리와 창기,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찾아가셨던 모습은, 이미 이 ‘은혜의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을 찾아오신 사건의 예표였다. 우리가 이것을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경험할 수 있는 길은, 십자가 앞에 스스로를 내려놓고, “오직 은혜로만” 나아오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이 은혜 안에 거하게 되며, 은혜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틀어 바울은 인간의 공로, 선행, 의식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단호히 배제했다. 이 점은 오늘날도 변함없이 유효하다.

우리가 로마서 4장 9-12절을 읽으며 특별히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주제를 마음에 새길 때, 교회가 진정 회복해야 할 영적 기초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 세상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 교회 안에서도 서열 의식을 만들어 서로를 재단하고 분열하는 태도,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목하에 자랑과 과시를 일삼는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은혜를 배반하는 길이다. 오직 은혜를 붙드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였음을 잊지 않기에, 서로를 사랑으로 품고, 교회와 세상을 향해 낮아져 섬기며,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감사와 겸손을 고백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무할례 상태에서 받은 ‘무조건적인 의롭다 하심’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자유’와 ‘감사’로 충만해진다. 이 자유와 감사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참된 복음의 능력이다.

끝으로, 장재형목사가 말한 대로, 값비싼 은총이 결코 ‘값싼 은혜’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값싼 은혜는 “그래도 구원받았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라는 식으로 변질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하지만 값비싼 은혜는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으니,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라는 감격과 열정으로 우리를 이끈다. 구원은 무료지만, 예수님에게는 값비싼 대가였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는 너무나도 고귀한 희생이었다. 우리가 이 희생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음을 안다면, 결코 그 은혜를 가볍게 여기며 방종에 빠질 수 없다. 오히려 날마다 주님께 감사하며, 그 은혜로 인하여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열망을 갖게 된다. 이것이 “은혜가 은혜 되게 하는” 참된 모습이며, 로마서에서 바울이 가르치는 복음의 정수다.

이렇게 볼 때, 로마서 4장 9-12절에 담긴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가르침은, 교회의 본질과 신앙생활의 방향을 확립해주는 초석이다. 오늘날 우리도 이 은혜 위에 굳게 서서, 율법주의와 인간적 의의 자랑을 멀리하고, 죄인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높이며, 믿는 이들에게나 아직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그 길을 열어두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충만히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은혜야말로, 로마서가 일관되게 말하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복음의 핵심이다.

2. 오직 믿음으로만

앞서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주제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얼마나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은혜가 ‘객관적 사실’로 존재할 뿐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적용되어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인간 편에서의 유일한 반응이자 조건이 ‘믿음’이라는 진리는 종교개혁 시기에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구호로 집약되었고, 장재형목사 역시 다수의 강해 설교에서 이 진리가 과거 어느 시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가장 절실한 복음임을 강조해왔다.

로마서 4장 9-12절에서도 바울은 의롭다 함을 받는 핵심 열쇠로 ‘믿음’을 거듭해서 제시한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롬 4:9),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롬 4:11)라는 말을 통해,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를 얻었는지, 그리고 그 의의 확증이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명쾌히 설명한다. 여기에 담긴 핵심은 분명하다.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은 것은 믿음 때문이었고, 그 믿음을 ‘할례’라는 행위가 뒤따랐지, 할례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믿음이란, 성경적으로 볼 때, 단순히 “하나님이 계시겠지” 하고 막연히 생각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오히려 성경적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근거하여 ‘삶을 움직이는’ 역동적 태도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을“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상황에서도(자신과 아내 사라가 늙어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상황), 그 약속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그를 의로 여기심을 받게 했다(창 15:6, 롬 4:17~22). 이런 믿음의 태도는 결국 삶에 변화를 일으킨다.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도, 고향을 떠나라는 명령도,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까지도, 아브라함은 비합리적으로 보일 만큼 순종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실제적 작동 방식이다.

이러한 믿음이 왜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말로까지 강조되는가?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어떠한 방식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안에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행위나 율법의 준수, 혹은 공로를 쌓는 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 해도, 우리의 죄성과 한계 때문에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기준 앞에 결코 흠 없는 자로 설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역사에는 늘 ‘내 힘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는 시도가 반복되어왔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도 마찬가지였고, 교회 역사 안에서도 여러 율법주의와 이단적 가르침이 늘 이런 착각을 일으켰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거듭 짚어주며,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을 개방된 마음으로 수용하는 통로라고 설명했다.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조차도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여러 기적을 베푸실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이 베푸시는 치료와 은혜는 누구에게나 향해 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믿음’으로 응답한 자들이었다. 그 믿음은 심지어 눈먼 거지, 병든 여인, 심지어는 죄인으로 손가락질받는 이들의 마음 안에서도 발견되었다. 반대로,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처럼 율법에 능숙하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은 자기 의를 드러내느라 예수님의 은혜를 거부하기도 했다.

로마서 4장 9-12절의 문맥으로 돌아오면, 할례를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주장하는 이들은 사실상 ‘내 행위나 의식이 구원을 결정짓는다’고 믿는 태도를 가졌다. 그것은 믿음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었다. 물론 할례나 세례나, 그 밖의 교회 의식들은 중요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 의식 자체가 구원의 능력이 되지는 않는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잔과 그릇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은 더럽다”고 하신 질책(마 23:25~26)은, 외적 의식에 치중하면서 내적 마음의 변화, 곧 믿음에서 비롯되는 순종과 경건을 소홀히 하는 태도를 향한 강력한 꾸짖음이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할례 자체가 아니라, 그 할례 뒤에 있는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복음을 확정 짓는다.

특히 갈라디아서 3장을 보면,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음을 재확인한 뒤, 이어서 “이와 같이 아브라함을 믿는 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느니라”(갈 3:9)고 선언한다. 그리고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갈 3:10)고까지 말하며, 율법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곧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함’만이 참 자유를 준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갈 5:1). 이는 곧 로마서 1장 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주제와 맞닿아 있다. 바울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정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 믿음을, 교회 역사 속에서는 루터와 칼뱅 등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집약했다. 그들은 중세 교회가 면죄부나 공덕, 성자 숭배 등을 통해 구원을 보장받으려는 행태를 강력히 비판하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통한 칭의’를 다시금 회복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여기서 “오직 믿음으로”라는 구호가, 행위를 전혀 무시하거나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야고보서 2장17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그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다. 아브라함 역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믿음 때문에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할례를 받고,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명령까지도 순종했다. 이처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는 그 은혜를 깨닫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는 열망을 갖게 된다. 이를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종하게 된다”고 했다(롬 1:5).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지만, 그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더 나아가 야고보서까지 엮어 설명하는 설교들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와“믿음의 열매로 선한 행위를 한다”라는 두 축이 모순이 아님을 자주 역설한다. 구원을 얻는 근거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지만, 구원받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한 삶’을 살며, 주님이 명하신 계명을 기쁨으로 지키고, 다른 이들을 섬기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즉 행위는 “구원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맺는 자연스러운 열매”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순서를 바로 잡지 못하면, 사람은 율법주의로 치우치거나, 반대로 ‘행위가 전혀 필요 없다’는 극단적 자유주의로 흐를 위험이 생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자유로 기회를 삼아 육체의 일을 하지 말라”고 한 경고도, 믿음으로 자유케 된 성도가 그 자유를 방종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는 점을 일깨운다.

로마서 4장 11-12절에서 바울이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말하는 대목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누린 모델이기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 구분 없이 ‘믿음으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된다는 의미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약속이 이제는 모든 믿는 이에게 열려 있다는 선언인 셈이다. 이는 교회가 민족이나 언어, 문화의 차이로 인해 분열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믿음 공동체’라는 정체성 안에서 연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준다. 우리가 서로 다른 환경과 배경을 가지고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아브라함의 복을 유업으로 이어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다.

이 믿음이 실제 신앙생활에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말씀 중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는 사건을 떠올릴 수 있다. 당대의 세리장 삭개오는 돈에 대한 욕심으로 동족의 등을 쳤던 죄인으로 손가락질받았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셨고, 삭개오는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을 개방했다. 그리하여 “주님, 제가 토색한 것은 사 배로 갚겠나이다”라고 공언하며 삶을 변화시켰다. 예수님은 이를 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선언하셨다(눅 19:9). 즉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구원을 가져왔고, 그 믿음이 삭개오의 실제적인 삶과 행동에 변화를 일으켰다는 예시다. 삭개오가 율법적으로 정결의 예식을 치렀거나, 특별히 어떤 공덕을 쌓은 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 자체가 그를 구원으로 이끌었다.

“오직 믿음으로만”은 마치 신앙생활을 쉽게 만들어주는 단순한 슬로건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십자가의 엄중한 의미가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아들을 죽이셨다는, 가장 극적인 희생 사건이 믿음의 바탕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그 사건을 ‘머리로 동의’하는 차원을 넘어, “이제부터 주는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나는 주의 종이 된다”라고 자기 삶을 온전히 맡기는 태도다. 로마서 10장 9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는데, 여기서 ‘주(主)’로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내 삶의 왕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행위다. 그게 진정한 믿음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마땅히 삶 전체를 바꾸어 놓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믿음의 변화력을 두고, 믿음은 단지 구원이라는 결승점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의 전 과정에서 계속해서 우리를 이끄는 힘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매 순간 삶에서 선택을 하고, 결정을 내리고, 갈등에 부딪히는데, 그때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가려는가?”라는 질문 앞에 선다. 믿음은 단발적 사건이 아니라, 날마다 지속되는 ‘살아 있는’ 관계다. 마치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에서 부름받아 떠났을 때만 믿음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99세에 할례 명령을 받을 때도,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을 때도, 매 순간 믿음으로 살아야 했던 것과 같다.이런 과정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욱 성숙해졌고,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로마서 4장 12절 마지막 부분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는 문장은, 단순히 구원의 초점을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사실에만 맞추지 않는다. 더 깊은 의미는,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의 삶’이 모든 신자가 걸어야 할 모범이라는 데 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확실한 보장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하고, 때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명령처럼 보이더라도 순종해야 할 때가 온다. 믿음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서 실제로 움직이고 헌신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결국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보여주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가르침이야말로 복음의 심장부라는 점이다. 이 복음은 모든 죄인을 향해 열려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결정적 근거를 얻었다. 어떤 죄인도 이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믿음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 의로움을 빙자해 방종에 빠지기보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순종과 거룩의 길로 나아간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이 선포하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다. 칭의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주어지는 신분상의 변화(죄인에서 의인으로의 변화)다. 성화는 그 이후의 과정으로서,믿음을 통해 점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말한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되거나 상충되지 않으며, 참된 믿음 안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실제로 역사상 여러 부흥 운동이나 영적 각성의 시기를 돌아보면, 진정한 부흥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복음이 강력하게 선포될 때 일어났다. 예를 들어, 존 웨슬리(John Wesley)는 로마서 강해를 듣다가 “내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고백했고, 그를 통해 감리교 운동이 일어나 영국과 전 세계에 부흥이 일어났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역시 로마서 1장17절 말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깨닫는 순간, 종교개혁의 불이 붙었다. 그러므로 로마서가 “성경의 심장부”라고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 믿음의 복음이 가장 선명하게 제시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여러 신앙 공동체가 있고, 다양한 신학적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진리는 어느 시대, 어느 교파를 막론하고 지켜야 할 복음의 근간이다. 장재형목사가 설파하듯, 이 진리가 흔들릴 때 교회는 필연적으로 인간적 노력이거나 제도, 의식, 공로에 의존하려 하면서 복음의 빛을 잃어버린다. 또한, 믿음의 가치를 오해하면, ‘어차피 믿음만 있으면 되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다’는 형태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6:5; 마 22:37)고 명한다. 진정한 믿음은 이런 전인적 헌신과 사랑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로마서 4장 9-12절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주어지고, 그것을 적용받는 통로는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사람의 무슨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 그것이 곧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믿음이다. 할례냐 무할례냐, 율법 준수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이미 바울의 결론에서 배제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나누어질 이유가 없고, 우리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길이 없다면,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은혜와 믿음뿐이다.

실생활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고민과 갈등 속에 신앙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을 맞닥뜨린다. 때로는 경제적 어려움, 질병, 인간관계의 파탄, 비전의 상실 등 여러 문제가 우리를 짓누른다. 그때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믿음은 문제의 크기나 현실의 무게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믿음은 “하나님은 선하시며,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붙드신다”는 확신이다.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어 이삭을 얻었고,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도 따랐던 배경에는, 그가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다”라는 확신이 있었다(히 11:11). 이처럼 믿음은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인도해주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결국, 로마서 4장 9-12절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며, 그 은혜를 내 것이 되게 하는 길은 오직 믿음이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기회에 반복해서 가르치는 이 진리는, 결코 구시대적 교리나 추상적 신학 이론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절박하며,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는 힘이다. 교회가 율법주의와 세속적 사고에 물들어간다면, 이는 곧 이 복음의 진리를 잃어버린 결과이자, 은혜와 믿음이 사라진 공동체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와 믿음을 다시 붙들면, 교회 안에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고, 성도 개개인이 죄와 절망에서 해방되어 새 생명의 능력을 누리게 된다.

요약하자면, 바울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 함을 얻었는지, 그리고 할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논의를 통해, 구원의 본질이 ‘은혜와 믿음’에 있음을 선포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이 선언에 우리의 존재와 삶을 내어맡겨야 한다.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듯, 오늘날에도 교회 봉사나 헌금, 혹은 열심히 성경을 읽는 일도 구원 자체를 얻는 도구가 될 수 없다. 오직“하나님의 은혜”가 근거이며, “우리의 믿음”이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손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제대로 뿌리내릴 때,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행위의 열매가 맺히고, 삶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복음의 심장이고, 로마서 4장의 핵심 메시지이자, 동시에 교회사를 통틀어 계속 반복되어야 할 가르침이다. 우리는 로마서 4장 9-12절 강해를 통해, “오직 은혜로만”과 “오직 믿음으로만”이 분리될 수 없는 한 쌍임을 재확인하게 된다. 이를 어느 한쪽이라도 소홀히 하면, 복음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오직 은혜로만”을 소홀히 하면 인간의 공로나 자랑이 들어오고, “오직 믿음으로만”을 소홀히 하면 은혜가 아무리 커도 우리 삶에 실제 적용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두 진리는 함께 붙들려야 하며, 교회가 그 진리 위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아브라함의 믿음에 동참하며, 그가 받은 복과 영광을 함께 누리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자녀로서의 삶은, 날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하며, 의로움의 열매를 맺어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소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무할례자에게도냐”(롬4:9)라는 바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결국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그 길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라는 복음의 핵심이다. 이렇게 복음이 개방될 때, 교회는 더 이상 배타적 종교가 아니라, 세상 모든 이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로마서가 우리에게 선포하는 강력한 메시지이며,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설교자들이 “오직 은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을 계속해서 외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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