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교회 내 갈등과 화해,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길
로마서 15장 전체에서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교회 공동체 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어떻게 해소하고 화해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점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진 형제들, 서로 다른 견해로 인해 충돌하는 이들에게 “서로 받아 하나 되어 주의 소망을 이루라”고 강력하게 권면한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의 수많은 갈등 사례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신학적 견해 차이, 교회 운영 방식의 충돌, 어떤 이는 보수적이고 어떤 이는 진보적인 사고를 지니는 등 무수히 다양한 이유로 갈등이 일어나는데, 바울은 그러한 갈등이 세상보다도 더 흉한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이는 교회가 ‘세상 사람들 중에 선택된 자들을 불러내어 형성된 공동체’라는 정체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와 같은 “교회의 거룩한 정체성”을 자주 강조해 왔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구별(separated)되면서도 동시에 세상에 대한 사랑과 섬김의 사명을 가진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의 본이 되지 못하면 오히려 복음의 장애물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갈등이 일어나는 지점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러 차례 설파했다. “자기중심적 기쁨이 아닌, 형제를 위한 사랑의 기쁨”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를 때, 교회 공동체는 세상 어느 조직보다 더 투명하고, 사랑이 넘치며, 영적으로 맑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 교회 공동체에게 나누어 준 여러 권면 중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문제를 다루는 로마서 14장과 15장은 교회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서로 다른 신앙 수준의 공동체 성원들이 어떻게 서로를 배려하고 아끼며 도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지침을 담고 있다.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가 결코 “약한 자”를 멸시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롬 15:1). 오히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강권한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권고 수준을 넘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는 영적 이유가 배경에 깔려 있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죄인들을 받아주시고, 그들에게 직접 다가가셨으며, 종의 모습으로 섬김을 보이셨다. 그리고 그 섬김 안에 기쁨이 있다고 하셨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자기만족적 기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자리에서 얻게 되는 “하늘의 기쁨”이다.
장재형목사 역시 요한복음 15장을 자주 인용하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어떠한지를 깨달아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의 길, 서로를 받아들이는 기쁨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 15:11)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직접 맞닿아 있다. 곧, 다른 이들을 사랑함으로써 얻게 되는 기쁨이야말로 교회의 참된 힘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랑의 기쁨을 교회 안에 실현하지 못하면, 곧바로 교회는 심각한 내부 분열의 위험을 맞이하게 된다.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너희는 말씀으로 돌아가라.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그분이 모든 모욕을 인내하셨음을 기억하라”고 가르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온갖 모욕과 비난, 그리고 죄인들이 마땅히 져야 할 죄책을 대신 지심으로써 그 사랑을 확증하셨다면, 형제들 역시 갈등이 일어날 때 ‘자기중심적 판단’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사랑’을 되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교회의 불화를 치유하고, 서로를 품는 힘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이 주시는 ‘인내와 위로’를 붙들어야 하며(롬 15:5), 그 인내와 위로를 통해 결국 ‘한마음과 한입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고 자주 역설한다. 즉, 말씀 묵상과 공동체 예배가 형식에 머무르면 갈등 해결이 어려우나, 실제로 주님의 모습을 깊이 묵상하고, 그분의 ‘십자가 사랑’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만이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 됨을 실현할 수 있다. 이는 교회 내 갈등 해소의 필수적 과정으로, 결국 모든 구성원이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은혜를 입은 자들이고, 그분께 빚진 자들”임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갈등을 내려놓고 서로 용납하는 길이 열린다.
그러나 이런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실제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각 신자의 ‘회개’와 ‘자기 비움’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아진다는 성경 말씀처럼, 갈등이 크다면 그만큼 더 큰 회개와 용서가 필요하다. 이때 교회가 서로 “우리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이전까지 막혀 있던 마음의 담이 허물어지고, 진정한 하나 됨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한마음과 한입으로 주를 찬양하며 증거하리라.” 여기에는 한 공동체가 동일한 방향을 바라보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서로 다른 배경, 문화, 성격,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묶이는 이 신비야말로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소망을 붙들고 있을 때, 비로소 세상에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해진다”고 설교한다. 이러한 확신은 로마서 15장 13절에서 말하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라는 축복 선언과 그대로 맞닿아 있다.
교회 내 갈등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인내가 우선되어야 한다. “여러분 안에 갈등이 있습니까? 싸우는 지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주님의 말씀 앞에서 내 태도와 마음을 살피십시오.” 바울의 권면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장재형목사 역시 갈등 상황에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나는 과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가?’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갈등의 해결은 궁극적으로 ‘주님 안에서 하나 되는 길’이다. 서로를 적대시하는 두 편이 주님을 바라보고 말씀에 비추어 겸손히 자신을 낮출 때, 거기에 진정한 화해의 물꼬가 트인다. 이 길은 쉽지 않지만,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결국 바울은, 서로 다른 견해와 전통을 가진 공동체들이 “약한 자를 품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섬기며,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으라고 반복적으로 권면한다. 이는 단순히 “좋게 지내자”는 사소한 도덕적 호소가 아니라, 교회가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한 근본적 윤리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신다는 사실이 교회를 ‘거룩한 공동체’로 세우는 주춧돌이기 때문이다.
2. 약한 자의 짐을 서로 지고, 이방인을 품는 사랑의 공동체
바울은 로마서 15장 초두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라고 역설한다. 이 짧은 구절은 교회의 구체적인 실천 지침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태도야말로 교회의 기본 모습임을 알려준다. 갈등 상황에서 흔히 보는 것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누르거나, 혹은 서로가 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타인을 무시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바울이 제시하는 교회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서로의 짐을 함께 지는, 그야말로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인용하며,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자리 잡으면, 자연스럽게 형제의 약점을 보았을 때 정죄보다 위로가 앞서게 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 골몰하기보다, 타인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할 때 오히려 영적인 기쁨이 넘치게 된다”는 역설적 진리를 제시한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이기적 성향이 강해서,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기중심적으로 돌아서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의 헌신과 배려를 통해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바울은 예수님의 모범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온갖 모욕과 비난을 대신 짊어지셨다(롬 15:3). 이는 십자가의 길이 곧 “사랑의 희생”을 의미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마치 요한복음 15장 12~13절에서 “서로 사랑하라,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말씀이 예수님의 삶으로 증거된 것처럼, 바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형제를 위하여, 자매를 위하여 자기 몫의 희생을 기꺼이 감수함이 참된 사랑이다. 그런 사랑을 통해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맛본다고 바울은 말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부분은 “이방인을 품는 문제”다(롬 15:7~13). 당대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매우 크고 뿌리 깊었다. 할례 문제, 율법 준수 문제, 전통과 관습 등에 있어 서로 어긋나는 지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분명히 명령한다(롬 15:7).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롬 15:16)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 복음이 온 세상으로, 즉 모든 열방 가운데 전파되는 비전을 품고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국경과 민족적 경계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담이 허물어진 사건이야말로 교회사의 커다란 전환점이라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인종, 문화, 언어, 경제적 배경의 차이 등으로 인해 교회 내 갈등이 일어날 수 있지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담은 허물어졌기에, 우리는 ‘넓은 마음으로’ 타인을 용납해야 한다는 논지다. 이처럼 이방인 포용은 단순히 바울 시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교회 공동체가 고민해야 할 지속적인 과제다. 우리의 주변에 있는 문화적·사회적 ‘타자(他者)’를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고 함께 예배드릴 수 있어야, 비로소 교회가 보편적 복음의 정신을 실천하는 셈이 된다.
바울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구약의 여러 예언, 곧 시편과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열방이 주를 찬송하도록 계획하셨다”(롬 15:9~12)고 힘주어 말한다. 즉,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범위는 특정 민족에만 한정되지 않고, 만국과 만민을 아우른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에서도 “막힌 담을 허시고, 둘을 하나 되게 하셨다”(엡 2:14)는 선언을 통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결된다는 진리를 선포한다. 교회는 바로 그 “하나 되게 하시는 복음”을 실천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강한 자들은 스스로를 높이기보다는, 약한 자와 다른 배경을 지닌 이들을 품어야 한다. 서로의 차이점이 때로는 갈등을 야기할 수 있으나, 결코 그 차이를 적대나 배제의 이유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을 풍성한 다양성의 기회로 여겨, 서로 배우고 성장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바울은 이것이 “사랑의 공동체”가 걸어가야 할 길이며, 그렇게 할 때만이 세상에 줄 수 없는 진정한 기쁨과 평강이 공동체 안에 임한다고 말한다(롬 15:13).
장재형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사랑을 체화하고, 이 땅의 모든 이방인(즉, 복음을 접하지 못한 자들, 혹은 문화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길은, 내부적으로 ‘상호 섬김’과 ‘미움의 담을 허무는 노력’에서 출발한다”고 설파한다. 사랑의 대상은 단지 외적 의미의 이방인뿐 아니라, 교회 내부의 소외된 자, 약한 자, 마음 다친 자, 혹은 다른 견해 때문에 따돌림당하는 자들을 포함한다. 이 모든 이들을 ‘한몸’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갈등은 자연스럽게 극복되고, 더 큰 하나 됨의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아울러 바울은 이 사랑의 공동체가 “감사와 찬양”이라는 언어를 통해 결속된다고 역설한다. 로마서 15장 9~12절에 인용된 시편과 이사야서 구절들은 ‘열방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미래’를 노래한다. 결국 교회의 본질은 감사와 찬양으로 충만한 것이다.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미움과 분쟁을 키울 여유가 없다. 찬양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영혼들은, 형제의 허물을 들춰내기보다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 돕는 길을 찾는다. 그때 교회는 “은혜와 평강”으로 충만해진다.
결국 바울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라는 축복어로 이 부분을 마무리한다. 이는 장재형목사가 말하듯, “교회의 참된 희망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으며, 그 은혜는 ‘하나 됨의 비전’ 안에서 가장 강력하게 역사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약한 자와 강한 자, 유대인과 이방인, 나아가 현대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자들 모두가 한 공동체로 연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야말로 바울이 꿈꾸었던 교회의 미래이자,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교회의 사명이다.
3. 바울의 간증, 예루살렘 방문, 그리고 성도의 연합을 위한 중보기도
로마서 15장 후반부(14~33절)는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편지를 마무리하며, 자신이 어떤 사역을 해왔고,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기도의 요청을 가지고 있는지를 밝히는 대목이다. 사실상 로마서 전체의 긴 결론 부분이자, 바울 자신의 목회적·선교적 열정이 표출되는 구절이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고 있음을 선언한다(롬 15:16). 그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이 소아시아 전역에 퍼지고, 더 나아가 로마의 접경 지역인 일루리곤(오늘날 발칸반도 인근)까지 전해지도록 헌신해 왔음을 자랑스럽게 밝힌다. 하지만 이 자랑은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혜로 된 것”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기 위함이다(롬 15:1718). 사도 바울은 “나는 나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전파한다”고 고린도후서 4장 5절에서 밝힌 바와 동일한 태도를 유지한다. 이처럼 바울의 선교적 열정은 “아직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곳”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개척정신에서 비롯된다(롬 15:2021).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두고, “선교란 이미 누군가 복음을 전해놓은 터전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역, 새로운 사람, 아직 예수를 모르는 영혼들에게 찾아가는 것에서 본질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해설한다. 교회가 참으로 살아 있고 역동적이려면, 늘 ‘개척정신(pioneer spirit)’을 가지고 ‘새로운 이방 땅’을 개척해야 한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그 이방 땅은 꼭 지리적 의미에 국한되지 않을 수 있다. 인터넷 공간, 첨단 과학기술이 열어 준 소통 채널, 다문화 환경, 정신적·사회적 약자의 영역 등, 복음이 미치지 못한 영역이 여전히 많다. 교회는 이곳들을 향해 “복음의 씨앗을 심고자 하는” 거룩한 도전을 감행해야 한다.
로마서를 읽는 독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 본부 교회”를 대단히 중시했다는 점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현재 고린도 지역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지만,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서 “성도를 섬기는 일”을 마친 뒤(롬 15:25~26), 비로소 로마로 방문할 계획을 세운다. 예루살렘의 형제자매들이 극심한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바울이 개척한 이방 교회들(마게도냐와 아가야 등지)이 모아 준 헌금을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에 헌신하고 섬김으로 돌아가려는 모습은, 그가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교회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선교적 원심력을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예루살렘 본부라는 구심력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믿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연합과 질서”라고 설명한다. 지역 교회들 간에 서로 분산되어 독립적으로 활동하되, 동시에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한 몸으로서 영적·조직적으로도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방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 사이를 중재하며 연보를 전하는 일은, 단순히 경제적 도움을 주고받는 행위를 넘어 “한 몸 된 교회가 서로 섬기고 격려한다”는 중요한 상징이 된다. 바울은 “육적인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롬 15:27)며, 이방 교회들이 유대인 교회로부터 영적인 혜택을 받았다면, 경제적·물질적 측면에서라도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곧 교회 안에서 서로가 빚진 자라는 영적 인식을 증명하는 길이다.
이후 바울은 “내가 이 일을 마친 후에야,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스페인)까지 가리라. 예루살렘 본부 교회에 내 사역의 열매를 보여주고, 그것이 확증된 뒤에 서바나로 가는 길에 로마 성도들도 만나고 싶다”는 희망을 밝힌다(롬 15:28~29). 여기에는 바울의 세계선교 비전이 담겨 있고, 또한 교회가 지녀야 할 ‘우주적(Cosmic) 예배’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다. 그는 단순히 몇몇 지역 교회만이 아니라, 땅 끝까지 이르러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만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대한 예배가 펼쳐지리라는 예언적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편지를 마치기 전,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구체적인 기도 제목 세 가지를 요청한다(롬 15:30~32). 첫째,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해 달라.” 당시 바울은 유대 땅에서 열심당원(Zealots)과 유대인 민족주의자들의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복음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율법의 완성을 외치는 바울의 메시지는, 그들에게 이단적이고 배교적인 주장으로 보였을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기도가 필요했다고 호소한다. 둘째, “예루살렘에 대한 섬김을 성도들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해 달라.” 다시 말해, 이방 교회의 연보와 사역 열매가 예루살렘 본부의 확인과 인정을 받아야 교회 전체가 분열 없이 한 몸으로 견고해진다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로마 교회)에게 나아가서 함께 편히 쉬게 해 달라.” 이는 바울이 선교지에서의 치열한 사역 후에, 로마 성도들과 평안한 교제를 나누고 싶다는 인간적인 소망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이 기도 요청이 보여주는 메시지를 “교회 일치와 중보기도”로 요약한다. 교회는 바울이 겪는 외적·내적 어려움에 대해 ‘함께 기도’로 참여해야 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를 구해야 한다. 또한 성도들이 서로에게 필요한 경제적·영적 지원을 하며, 한 몸 된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와 위로를 나눌 때, ‘모든 민족에 이르는 복음 전파’라는 대사명도 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결국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롬 15:33)이라는 축도로 로마서 15장을 사실상 마무리한다. 소망의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을 말하면서 교회가 서로 하나 되는 길은 오직 그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교회가 개인주의와 세속주의 물결 속에서 갈라지기 쉬운 시대적 흐름을 맞닥뜨리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소망은 “소망의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평강도 “평강의 하나님”께 달려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 존재이며, 그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심을 믿으라”고 강조한다. 교회 내 갈등이 심화될수록, 또 복음 전파의 장애물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더욱 중보기도를 쉬지 말아야 하며, 서로 돕고 섬기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15장이 담고 있는 바울의 메시지는 오늘날 교회 현실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권면이다. 첫째, 교회 안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 인내하고 용납할 것. 둘째,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지며, 이방인과 같은 ‘다른 존재’를 넓은 마음으로 품을 것. 셋째, 바울이 직접 보여 준 것처럼 교회가 서로 중보기도하고, 헌신적 섬김을 통해 ‘하나 된 교회’를 지향할 것. 장재형목사는 이 셋을 가리켜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세 기둥”이라 부르곤 한다. 왜냐하면 이 기둥들이 바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상에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도록 떠받쳐 주기 때문이다.
“우리를 부르신 주님께서 친히 갈등을 해결하시는 중재자가 되시며, 성령을 통해 우리가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실 것이다.” 바울의 확신과 설교자들의 선언은 시대를 넘어 교회 공동체마다 유효하다. 우리가 이 말씀을 실제 삶에서 구현하고자 할 때,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는 참된 통로가 될 것이며, 서로 받아들이고 하나 되어 주의 소망을 이루는 거룩한 부르심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