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 대학교 설립자)의 강해를 중심으로
장 프랑수아 밀레의 명작 〈만종〉은 우리에게 침묵의 깊이를 가르쳐줍니다. 고된 하루의 노동을 마친 부부가 들녘에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모습은, 인간의 가치가 단순히 생존을 위한 투쟁에 매몰되지 않음을 상징합니다. 흙먼지 묻은 손과 거친 옷차림 속에서도 그들이 영원을 향해 마음을 여는 순간, 평범한 일터는 거룩한 성소로 변화합니다. 신앙이란 바로 이러한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자신의 삶의 좌표를 재설정하는 거룩한 멈춤에서 시작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그의 강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설명하는 핵심 틀인 ‘그리스도의 삼중직무’가 어떻게 우리 삶의 근원적 질문에 답하는지를 탐구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며, 치유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사역의 분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무지(가르침)와 죄악(전파)과 고통(치유)이라는 비극적 현실을 어떻게 돌파하는지를 보여주는 입체적인 사랑의 방식입니다.
1. 갈릴리의 부르심: 정보의 전달을 넘어 존재의 변화로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것은 단순한 직업의 변경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버려두었던 ‘그물’은 그들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자, 내일의 안전을 보장하는 생존의 울타리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은 그 낡은 울타리 너머에 있는 영원한 영광의 세계를 보게 했습니다.
- 가르침의 본질: 주님의 가르침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사고의 전복’입니다. 참된 성경 묵상은 머리로 이해한 텍스트가 심장을 거쳐 손과 발의 순종으로 흘러갈 때 완성됩니다.
- 우선순위의 재편: 누가복음이 강조하는 제자도는 냉정해 보일 만큼 단호합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소유를 안보로 삼는 인간의 본능을 흔듭니다. 제자는 과거의 안전지대에 머물며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푯대를 향해 전진하는 사람입니다.
2. 광야의 시험: 말씀 위에 세워진 정체성
마태복음 4장에서 펼쳐지는 광야의 시험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직면하는 영적 전쟁의 요약본입니다. 사탄은 인간의 가장 취약한 세 가지 지점인 물질(떡), 신뢰(성전 꼭대기), 권력(만국의 영광)을 공격합니다.
- 떡의 유혹과 말씀의 우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선언은 물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물질 세계를 창조하고 지탱하는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명확히 하는 가치관의 선포입니다.
- 시험을 넘어서는 믿음: 사탄은 언제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전제를 달아 우리의 정체성을 흔듭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잊어버리는 순간, 물질은 주인이 되고 명예는 우상이 됩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말씀 위에 견고히 서 있을 때, 모든 유혹은 사명의 기회로 전환됩니다.
- 청지기적 질서: 제자도의 경제학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 속에 있습니다. 이는 필요를 인정하되,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뜻보다 앞서지 않게 하는 영적 질서를 잡는 훈련입니다.
3. 말씀의 통찰: 회개에서 기쁨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순환
그리스도의 삼중직무가 공동체 안에서 역동적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의 토양이 비옥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이 권면하듯,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공동체만이 복음의 야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 에스라의 부흥: 느헤미야 8장에서 백성들이 율법책 낭독을 들으며 울었던 이유는 말씀이 그들의 죄를 날카롭게 비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곧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는 위대한 기쁨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참된 회개는 언제나 정죄가 아닌 새로운 삶의 기쁨으로 귀결됩니다.
- 생명의 순환 구조: 복음은 개인의 위로에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배운 말씀은 서로를 향한 권면이 되고, 그 권면은 세상으로의 전파가 되며, 전파는 다시 누군가를 제자로 세우는 순환을 이룹니다. 이것이 교회가 지향해야 할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4. 치유와 회복: 세상을 향한 사랑의 삼중주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단순히 신체적인 질병의 제거를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깨어진 인간의 전인적 회복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 직무를 계승한다는 것은 예배당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세상의 아픈 곳으로 파고드는 것을 뜻합니다.
- 베드로의 고백: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사도행전의 선언은 교회의 본질적인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복음의 생명력이 사람을 다시 걷게 합니다.
- 소유에서의 자유: 재물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것이 마음의 보좌에 앉는 순간 재물은 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능, 시간, 물질을 ‘나의 것’이 아닌 ‘맡겨진 것’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을 위해 그것을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맺음말: 오늘, 우리 앞에 놓인 푯대
장재형 목사의 통찰이 남기는 마지막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울려 퍼졌던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은 과거의 박제된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쥐고 있는 그물(소유)과 마음의 두려움(불확실성) 위로 조용히 들려오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가르치고 전하며 치유하는 사명을 회복할 때, 세상은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실제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자신의 소유를 내려놓고 말씀의 푯대를 향해 전진할 때, 절망의 언어는 소망의 찬양으로 바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으며, 누구에게 그 사랑을 흘려보내고 있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시작되는 곳에서 참된 제자의 길은 다시 열립니다.